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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행 Nocturama
 
권도연
더 소소
2022. 12. 3 - 12. 30

야간행 Nocturama

 

      나에게는 한 가지 이상한 기억이 있다. 아홉 살 무렵 나는 할머니와 둘이 살았다. 할머니는 시장에 있는 식당에서 밤늦게까지 일했다. 급식이 끊기는 방학마다 나는 그 식당에서 자주 끼니를 때웠다. 삼십 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곳에서 오 분 만에 그릇을 비우고 해지기 직전 다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날의 기억은 유난히 생생하다.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주머니에 열쇠가 없었다. 공기는 차갑고 어디선가 짐승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 밤길을 걸어 할머니에게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빨리 집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이 문만 통과하면 다 내 것이 있었다. 내가 아는 것들, 따뜻하고 거칠고, 부드럽고 닳은 것들, 내 냄새가 배어 있는 베게 같은 것들이 전부 있었다. 나는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창밖에 서 있었다. 문에는 불투명한 유리가 있었고 안쪽에는 파란 커튼이 걸려 있었다. 나는 그 커튼에 가려진 것들이 무엇인지 그것들이 어떻게 놓여 있었는지 상상했다. 그리고 투명해진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떻게 된다는 생각도 없이 손을 넣고 휘저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몇 년 전부터 내 사진의 쓸모에 대해서 고민했다. 오랜 고민 끝에 세상에는 기록해야 할 빛나는 존재들이 분명히 있는데 내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빛나는 것들을 발견해 내기 위해서 훨씬 더 큰 노력과 단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마주하고 기록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것은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여우 한 마리가 있었다’라는 단순한 문장 하나를 쓰기 위해 필요한 노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무런 만남 없이 종일 헤매는 날들이 쌓여갔다. 거미줄에 얼굴이 덮이고, 가시덩굴에 어깨가 찢기도록 다녔지만, 성과는 크지 않았다. 나는 그들 각자의 발자취를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여전히 난폭한 이 세계에 반짝이는 존재들이 있으므로 세계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덜 폭력적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밤길에 만난 친구들이 안녕하길 소망한다.

 

 

     산양

 

     '살아있는 고대 동물', '화석동물'이라고 불리는 산양. 200만 년 전부터 지구에 서식하면서 그 모습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 같은 별칭으로 불리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신석기, 청동기 시대부터 서식이 확인됐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살아왔지만, 서식지 파괴, 먹이 부족, 밀렵 등의 피해로 인해 멸종 위기에 처해있다. 지난 3월 경북 울진과 강원 삼척을 덮친 산불은 주변의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 사람뿐 아니라 숲에서 살아가는 야생동물에게도 큰 피해를 남겼다. 약 1,316만 평이 불에 타고 화마는 사람 앞에서 멎었지만, 그 피해가 동물에게는 지속되었다. 먹이 식물이 다 타버린 서식지에서 산양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대규모 이동을 시작했다. 인간이 접근하기 어려운 높은 바위 지대에 서식하는 산양이 위험을 무릅쓰고 도로까지 내려오는 일이 늘어났다. 나는 지난 4월부터 산양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산양이 좋아하는 뽕잎과 소금을 짊어지고 올라갔다. 산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출발해서 30도 이상의 경사로 쭉 뻗은 능선을 네발로 기어서 엉금엉금 올라가야 했다. 까만 잿더미 사이로 산양 분변 흔적을 발견하면 그 주변으로 먹이를 내려놓았다. 그러던 유월의 여름날 저녁,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던 시간이었다. 산을 걷던 나는 타버린 떡갈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있는 산양을 만났다. 산양은 내 모습을 세심하게 살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잿빛 눈망울은 어둠 속에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았다. 우린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우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인 여우는 한반도 전역에 서식하던 동물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1960년대 쥐잡기 운동과 함께 서식 환경이 파괴되면서 개체 수가 급감하며 1980년대 이후엔 사실상 멸종했다. 그러다 2004년 강원도 양구에서 여우 사체가 발견되면서 복원사업이 시작됐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종복원기술원의 여우 복원팀은 소백산에서 토종 여우 복원사업을 벌이고 있다. 현재 소백산에 방사된 여우는 총 74마리다. 지난 8월 소백산에서 내려와 복숭아 과수원을 지날 때 가늘고 긴 꼬리를 보았다. 나는 낯선 기척을 느끼며 젖은 흙더미를 유심히 노려보았다. 어린 여우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어둠 속에서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목에 GPS 수신기가 없는 걸로 봐서 복원된 여우의 새끼로 보였다. 어린 여우는 어찌나 다니길 좋아하는지 쉴 틈이 없었다. 샘에서 물 한 모금 마시고 곧 저 봉우리로 옮겨가고 별 뚜렷한 이유 없이 영역을 횡단하기도 했다. 어릴 적 여우를 보고 너무 이뻐서 쫓아가다 정신을 차려보니 세상의 끝이었다던 할머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만난 여우는 소백산에서 400km를 이동해 해운대 달맞이 고개에 사는 수컷 붉은 여우(SKM-2121)이다. 21년생 21번째 개체인 이 여우는 소백산에서 동해안을 따라 산불이 났던 울진을 거쳐 부산까지 국토를 종단했다. 전체 이동 거리는 400㎞에 이른다. 한 생태학자는 인터뷰에서 이동의 가장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여우의 호기심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사슴

 

     2020년 여름, 신문에서 순천의 도심 도로 한가운데를 사슴 무리가 횡단하는 사진을 보았다. ‘도심에 나타난 꽃사슴은 10여 년 전 순천시 조례동의 한 백화점 인근 사슴농장에서 봉화산으로 탈출한 사슴 두 마리가 번식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현재 순천시에는 야생 꽃사슴 100여 마리가 서식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도심에서 꽃사슴이 서식할 수 있을 정도로 생태계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라고 기사가 게재되었다. 나는 그 사진에 이끌려 사슴을 찾아다녔다. 봉화산 아래 동천은 부나방을 꼬이게 만드는 가로등처럼 야생동물을 홀렸다. 사방으로 연결된 도로의 아래는 작은 습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초지와 버드나무가 조화롭게 자리 잡고 있다. 야생동물의 훌륭한 먹이터로서 손색이 없고, 사람이 없는 은신처로서의 가치도 크다. 하지만 사슴이 이곳에 오기 위해선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녹지를 둘러싼 사면의 도로를 건너야 하기 때문이다. 이곳을 둘러싼 도로에서는 야생동물의 죽음이 반복해서 관찰되고 있다. 이곳의 녹지는 분명 매력적인 서식지이지만, 이로 인해 오히려 생태 덪이 되어 이 지역 개체군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권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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