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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멀티버스
Amazing Multiverse

 
박기원, 이인현
더 소소
2023. 6. 16 - 7. 14

나비 효과

 

 

          두 작가의 결합은 그저 하나에 하나를 더해 둘이 되는 단순한 덧셈이 아니다. 두 사람의 작품이 한 공간에 걸릴 때까지 그 사이에는 수많은 경우의 수가 존재한다. 그 많은 수들은 큰 변화가 없이 평범하게 지나가기도 하고, 약간의 재미를 선사하는 사건이 되기도 하며,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내기도 한다. 그 중에 어떤 것은 브라질에서 나비가 한 작은 날갯짓이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일으킨다는 나비 효과처럼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예측 불가능한 경우의 수들은 무수한 결과값이 병존하는 멀티버스를 생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그 멀티버스를 날개짓하며 여행하는 두 작가가 있다. 박기원, 이인현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혼돈의 카오스 속으로 뛰어들어 자신들의 멀티버스를 만들어간다.

          두 작가의 멀티버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작인 이들의 첫 날갯짓부터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박기원은 이인현이 일본에서 돌아와 <회화의 지층> 연작으로 개인전을 잇따라 열 당시 그의 작품을 실제로 보게 되었다. 그는 회화를 규정하는 미술사적 구조에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을 보며, 이인현이라는 작가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한편 이인현은 박기원이 2010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에 선정되었을 때, 그 전시의 사진을 인터넷으로 접했다고 한다. 그는 미술관의 아우라를 한순간에 뒤바꾸는 탁월한 작품에 매료되었고 그 때부터 박기원이라는 작가를 마음 속에 품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이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오직 작품만으로 서로에게 작은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들이 2014년 갤러리 소소의 4인전에서 만났을 때 이들은 비로소 한 공간에 자신들의 작품을 함께 걸게 되었다. 물론 이전에 단체전에 함께 참여한 적은 있었지만 작가마다 설치구역이 나누어진 전시였기에 그것을 협업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2014년의 단체전부터 시작된 이들의 인연은 2021년 차(茶) 스튜디오에서 열린 《박기원이 이인현을 만났을 때》에서 처음으로 2인전이라는 전시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둘의 작품을 오랫동안 지켜본 갤러리 소소와 류병학 미술비평가의 공동기획으로 진행된 이 전시는 두 작가가 온전히 대면하기에 안성맞춤인 장이었다. 공간에 대한 탁월한 해석을 특징으로 하는 둘의 작업은 날 것 그대로의 공간에서 더하고 뺄 것 없는 서로의 진면목을 펼쳐 보였다.

          스스로 텅 빈 공간과의 대화라고 말하는 박기원의 작업은 공간에 대한 최소한의 간섭으로 큰 흐름을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그가 만든 차(茶) 스튜디오도 마찬가지여서 골조가 드러난 노출 콘크리트의 공간은 과하지 않은 리모델링으로 건물이 가진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인현은 이러한 공간에 화답하듯 데칼코마니 형태의 작업 2점을 입구 정면에 나란히 걸어 날카로움을 더하고, 2층에는 다섯 캔버스를 합쳐 완성한 짙은 푸른색 작품으로 무게감을 주었다. 여기에 물감의 농도를 연습했던 천을 이용한 작품을 전시함으로써 작업의 시작까지도 그대로 보여주었다. 박기원은 정면이 아닌 옆 벽의 모서리 쪽에 회화를 설치하고 바닥에 하얀 클로스 볼들을 위치시킴으로써 전시 공간의 공기를 완성하였다.

          이렇게 자신들의 온전한 모습 그대로 첫 호흡을 가진 차(茶) 스튜디오에서의 전시 개최 후 2년이 지난 올해, 두 작가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이어진 연속적인 전시들로 협업의 기지개를 다시 펴기 시작했다. 각 전시는 별개의 기획에 따른 제안이었지만 결과적으로 4, 5, 6월에 걸쳐 세 번의 전시가 연달아 개최되는 일정이 만들어졌고, 두 작가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작가 구성에 변화 없이 앞 전시가 끝나기 전에 다음 전시가 시작되는 이 살인적인 일정은 동어반복적인 전시로 귀결되기 쉬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들의 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공간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세 개의 전시를 내놓았다.

          올해 첫 전시인 운중화랑의 《길이와 넓이와 두께에 관한 시간》에서는 살롱을 연상시키는 전시공간에 두 작가의 작품이 마주보게 배치되었다. 실제 미술사 아카데미를 진행하기도 하는 이 화랑에서 두 작가는 강렬한 작품들을 걸었는데, 전시 포스터의 모티브가 된 이인현의 짙은 블루와 박기원의 선명한 레드는 강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이인현은 작년에 개최된 개인전에서 선보인 버려진 천의 사용, 제작년도가 다른 작품의 결합, 프레임의 작품으로의 편입 등 여러 도전적인 의미를 가진 작품 <회화의 지층 – 라그랑주 포인트>를 포함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파격적인 최신작과 각 작품들이 가진 색의 대비에도 불구하고 전시공간은 우아하고 단정했다. 두 작가는 화병의 꽃과 책꽂이가 있는 이 공간에 정갈하고 편안한 배치를 선택함으로써 어른의 대화를 나누듯 우아하고 편안하게 자신들의 호흡을 전달했다.

          바로 뒤를 이은 갤러리R의 전시에서 두 작가는 완전히 다른 속도과 공기로 공간을 변모시켰다. 류병학 미술비평가가 기획한 《자강두천》은 ‘자존심 강한 두 천재’라는 신조어를 빌린 제목처럼 박기원과 이인현이라는 걸출한 두 고수의 만남이 강조된 전시였다. 두 작가는 생각만으로 수만 번의 합을 겨루는 무림의 고수들처럼 간단한 논의 후 각자 준비한 작품들로 텅 빈 하얀 공간을 저 너머의 은하계로 순간이동시켰다. 이들은 두 캔버스로 된 이인현의 작업을 분리하여 가로로 길게 설치함으로써 입구에서 이어지는 복도의 원근감을 극대화시켰고, 그 길을 따라가다 90도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평행우주를 모티브로 한 이인현의 신작과 바닥을 뒤덮은 박기원의 검은색 클로스 볼 설치작품으로 은하계 한복판에 들어선 것 같은 장관을 연출했다. 그 은하계를 지나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면 형광빛이 도는 박기원의 회화 작품과 마주치게 하여 그 너머에 있을 또 다른 우주까지 상상하게 하는 것이다.

          18세기 프랑스의 살롱을 연상시키는 《길이와 넓이와 두께에 관한 시간》과 미래의 우주여행으로 타임워프한 듯한 《자강두천》은 이렇듯 완전히 다른 시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면면을 들여다보면 출품작들이 너무나 박기원답고 무척이나 이인현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작가는 자신들이 구축해온 예술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앞에 주어진 상황에 유연하게 반응함으로써 이토록 같으면서도 다른 전시를 만들어낸 것이다. 두 작가가 서로에게 작은 영향을 주고 받는 사이 그 결과는 이렇게 큰 차이가 되어 돌아왔다. 십 수년 전 서로의 가슴에 스며든 나비의 작은 날개짓은 서서히 폭풍우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나비 효과가 만드는 이 멀티버스의 가능성을 두 작가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들은 앞의 두 전시를 준비하며 다음 전시인 더 소소에서의 전시 제목을 《환상의 멀티버스》로 정했다.

          《환상의 멀티버스》가 펼쳐지는 갤러리 소소의 서울전시관 더 소소는 을지로의 청계천변 공구거리의 거친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는 곳이다. 오래된 빌딩의 답답한 구획을 뚫어 넓게 만든 전시 공간은 양 끝의 큰 창으로 주변 빌딩과 북한산의 풍경이 거침없이 치고 들어온다. 이 공간을 생각하며 박기원은 비닐 설치작업을 진작부터 떠올렸다고 한다. 그는 도시풍경을 반투명 비닐로 커튼처럼 막아 빛과 가벼운 움직임만으로 외부와 내부를 연결했다. 빌딩으로 가득찬 뒷골목에 면한 창에는 은은한 푸른빛이 도는 비닐로 작업하고 멀리 북한산 방향으로 하늘을 향해 열린 창쪽에는 우유빛의 비닐을 사용했는데, 그 은근하고 미묘한 차이는 창 밖의 풍경을 은밀하게 암시하면서 내부에 설치된 이인현의 짙은 푸른색 작품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이인현이 전시 제목인 환상의 멀티버스를 부제로 삼아 완성한 일련의 신작에는 같지만 다른 두 세계가 공존한다. 그는 푸른색 유화물감을 가득 머금은 천에 두 개의 천을 겹쳐서 찍어낸 후 이를 분리하여 각각의 판에 고정하고 나란히 배치했다. 이때 두 화면은 비록 같은 원천에서 나왔지만 겹쳐진 두 천에 물감이 스며드는 물리적인 차이 때문에 다른 형태를 지니게 된다. 얼핏 보면 전혀 다른 두개의 화면이 병렬된 것처럼 보이는 작품은 같은 원천에서 나올 수 있는 여러 결과를 동시에 보여준다. 거기에는 이인현의 말을 빌리면 겹쳐진 천을 떼어낼 때 ‘쩌적’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친 우연의 결과까지 포함하고 있다. 치밀하게 계산된 우연을 통해 예리하게 정제된 조형미를 구축해왔던 이인현은 그 격렬한 결과가 놀라울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다가 다음날에는 정반대로 마음에 쏙 들었다고 한다. 그는 같지만 다른 두 세계를 만들어내는 작업의 과정에서 일어난 예측되지 않는 마음의 두 방향까지 즐겼던 것이다.

          박기원의 비닐 작업 <신성한 바람>이 만든 푸른 빛의 새벽에서 이인현의 <회화의 지층 - 환상의 멀티버스>가 일으키는 거대한 우주 폭풍을 거쳐 다시 박기원의 또 다른 <신성한 바람>의 하얀 빛으로 나아가면 그 아래에는 반짝이는 금속들로 이루어진 박기원의 설치 작업 <빙하>가 있다. 밤을 지배했던 우주를 여행하고 서서히 지구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 뽀얀 빛을 받은 벽에는 풀빛을 머금은 박기원의 회화가 자리한다. 우주의 폭풍에서 숲의 산들바람으로, 밤의 강력함에서 빛의 화사함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인현이 예측되지 않게 생겨난 두 개의 다른 조형에서 비롯된 상반된 두 마음을 즐긴 것처럼 박기원도 이 전환을 즐기듯 환하고 경쾌한 회화를 걸었다. 그의 회화는 녹색의 화사한 변주 속에 온갖 방향으로 선들이 신나게 교차하고 있다.

  

          박기원의 신성한 바람은 작은 날개짓으로 공간에 미풍을 일으킨다. 그 바람은 이윽고 폭풍이 되어 이인현의 환상의 멀티버스에 거칠고 푸른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이 거대한 폭풍에 즐거워진 듯 박기원의 회화는 더 환하게 빛나며 무수히 많은 선들을 교차시킨다. 아주 작은 선택과 아주 작은 호감과 아주 작은 공기의 흐름은 이렇게 혼돈의 카오스로 거침없이 나아간다. 하나의 날개짓마다 하나의 세계가 생겨난다. 그 세계들은 겹쳐지고 뭉쳐지며 거대한 폭풍우를 일으킨다. 이 용감한 나비들은 그 폭풍 속으로 날아들어간다. 그렇게 멀티버스는 생겨난다. 두 나비가 날아다니는 이 환상의 멀티버스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다.

 

전희정(갤러리 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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