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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nterly Shadow

권봉균, 김현진, 오병탁, 원민영, 윤현준, 신동민
노충현, 양기찬 기획 
더 소소
2024. 3. 8 - 4. 5

 

페인터리 섀도우 Painterly Shadow

 

양기찬 ​

 

 

   그림자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그림자의 원형이 되는 존재와 그를 비추는 빛이 수반되어야 한다. 빛이 밝게 빛나도 이와 부딪힐 대상이 없다면 그림자는 성립되지 못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조건 속에서 실물의 외양을 흉내 낸 그늘의 모양은 변덕스럽다. 지상으로 빛이 닿는 시간은 제한적이고, 자연 속의 광원은 멈추질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니, 음영이 지는 면적과 각도도 수시로 변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그늘의 주인에 따라, 그리고 그늘이 닿는 지면의 굴곡과 질감에 따라 그림자는 제 모습을 달리한다. 이러한 그림자의 성질을 빗대어 고대 아테네의 철학자, 플라톤은 지금까지도 잘 알려진 이데아론을 동굴의 우화로 펼쳤었다.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그의 이론에 따르면, 현실의 세계는 원본인 항구적 실재를 본뜬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진술한다. 영구불변의 본질을 진실로 수용하지 않는 오늘날에는 호소력을 잃은 논증이긴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현대의 관점에서 주목해 볼 부분은 이데아의 여부에 있지 않다고 본다. 그보다는 그가 일상에서 목격한 그림자를 통해 물리적으로 감각할 수 없는 세계를 문학화 한 시도에 있다. 이 고대의 철학자는 현상계를 헛것으로 치부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덧없는 현실의 경험에서 그는 자신의 이데아를 연상하고 정립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번 전시에서 ‘섀도우(Shadow)’는 창작자들이 목도한 세계, 그리고 그것의 환영을 비유하는 말로 채택되었다. 특별히, 여기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감광 반응으로 구현된 구체적이고 정밀한 재현이 아닌, 페인터(painter)들의 관찰과 사유, 그리고 몸으로부터 형성된 엉성한 허상들로 가득하다.

   기계의 눈도, 몸도 아닌 불완전한 육신과 물질의 맞닥뜨림 속에 그려진 형상들은 디지털의 광명이 제시 못하는 육체적 실존을 갖춘다. 빛보다는 감촉이 느껴지는 안료, 차원 넘어가 아닌 현실에 걸려 있는 오브제로 회화는 스스로를 만질 수 없는 신비로부터 거리를 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전하는 몸체와 반대로 회화가 품은 환영은 밝혀질 수 없는 미지로 여전히 놓여 있다. 물리적으로는 획들이 쌓인 레이어들의 집합이지만, 그것이 이루는 상은 무언의 상황을 연상케 하는 신기루이기 때문이다. 이를 그저 망막의 착시로 단념하기에는 그 속의 미시 세계가 불러일으키는 기시감과 불편함은 보는 이에게 사건적이며, 물질로는 실존적이다. 이처럼 <페인터리 섀도우(Painterly Shadow)>는 회화로 구성된 전시이지만, 한편으로 회화라는 대명제로만 논증할 수 없는 페인터리(painterly) 이미지들이 편재하고 있다. 각 이미지 속에는 귀결되지 않을 서사나 상징을 유추하게 만드는 도상들이 등장하나, 공교롭게도 이 존재들은 회화적 상태로 존립하려는 목적성 이외에 외적인 맥락을 전면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이들의 내용을 외부에서 발견하고자 한다면 되려 미궁 속에 빠져들기 마련이다. 앞선 특징을 염두한다면 작가들의 태도는 형식주의에 근접하나, 추상회화가 아닌 여러 회화적 장르로 분립한다는 점에서 다른 갈래의 순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특정 장르에 대한 관례적 답습에서 비롯되기보다, 각 작가들이 회화의 체계 속에서 달리 주목한 성질들을 집약적으로 탐색하여 다분화 한 결과로 비추어진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참여 작가들은 자신들의 처지에서 접할 수 있는 감각, 그리고 평면 오브제와 안료의 물리적 성질로부터 회화의 단서들을 수집해 나간다. 그로부터 파생된 이곳의 회화들은 단일한 매체성을 선언하는 대신, 회화의 단면을 밝히는 회화적 환영들로 소개가 된다.

 

   회화적 이미지를 발현하고자, 현실의 존재들을 본래의 의미로부터 일탈시키는 작가들이 있다. 화면을 손상시키는 방식에 관심을 두는 권봉균 작가는 현실의 존재를 매개의 대상이 아닌, 회화에 침투할 실재로 바라본다. 그는 회화의 매개성을 의식하는 듯 하나, 그렇다고 회화 속의 존재를 선명하게 묘사하여 완전히 밝혀내지 않는다. 작가는 점묘에 가까우면서도 획과 획의 경계를 뭉개는 붓질을 통해, 생명체나 일상의 풍경을 초점 흐린 화면처럼 구현한다. 사실화로 비추어지더라도 뚜렷하지 않은 재현으로 도상을 담았기에, 그의 그림을 마주한 이는 회화 밖의 실체와 회화의 현전 사이의 격차를 실감하게 된다. 때문에 그의 사실적 회화는 피사체가 회화로 제시되면서도, 동시에 회화가 피사체로 제시되는 무경계성을 갖춘다.

   원민영 작가는 권봉균 작가와 마찬가지로 구상화를 그리지만, 이미지를 조합하여 현실에 있을 법한 허구의 장면을 만드는 차이가 있다. 그는 피나 사체와 같이 현실에서 기피하는 대상, 혹은 찰나에 나타났다가 망각된 인상을 파스텔 톤의 회화로 박제하여 부패하거나 사라지지 않을 상태로 탈바꿈한다. 대상을 그림으로 변형할 때, 작가는 작은 붓의 촘촘한 묘사로 마티에르(matière)를 최소화하여 이미지의 표면을 고르고 평평하게 유지시킨다. 이러한 방식으로 구현한 그의 회화는 사진만큼이나 평면성이 도드라지고, 타일처럼 두께감이 있는 오브제로 정돈된다. 이처럼 그는 바라볼 수 있으나 어루만질 수 없는 회화의 환영과 평면성을 부각하여, 회화를 소멸될 수밖에 없는 존재를 보존하는 장치로 해석한다.

   원민영 작가가 그랬듯, 김현진 작가와 윤현준 작가는 이미지의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 회화적 이미지를 창작해낸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은 중력을 거스르는 상황을 서슴없이 표현한다는 것이다. 김현진 작가는 창작자가 대입한 서사성이 아닌, 회화 스스로가 독립된 서사성을 보유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불을 내뿜는 날개 달린 뱀”(용)처럼 문학에서는 텍스트로 불가능한 조합이 가능하듯, 작가에게 있어 그림은 형상들 사이의 경계가 교차하고 융합될 수 있는 신비의 매체다. 공간에 벗어날 수 없는 조각과 선형적 시간에 속박되는 영상과 다르게, 그는 회화를 공간과 시간의 제약에 메이지 않는 육화(肉化) 된 판타지(Fantasy)로 바라본다. 작가는 이러한 회화의 주어진 조건을 감추지 않고 되레 자유로이 활용하여, 공중 위에 새겨진 문구, 하늘에 떠 있는 얼굴 등의 기묘한 장면을 그려 나간다. 어디까지나 허구의 산물일 뿐, 어느 설화에 유래를 두고 있지 않은 그의 그림들은 관객들에게 여러 갈래의 이야기를 연상케 할 객체로 존립한다.

  

   이미지들을 분해하고 조립하는 원리는 유사하나, 윤현준 작가는 서사의 개연성조차 허용하지 않을 불시의 상황을 화면 속에 표현한다. 도상과 기호의 통상적 의미를 흩뜨리고, 상식 범위의 상황으로부터 일탈하고자 그는 여러 출처의 이미지들을 중첩하며 그려간다. 실제로 작가는 작품의 소재를 채택할 때, 이미지들의 의미보다 색상과 형태 등의 물리적 성질에 주목하는 편이다. 선택한 이미지들의 접합 속에서 그는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을 맞이하지만, 이를 부정하고자 획을 긋고, 그로부터 분해된 장면을 다시 다른 이미지와 획들로 덧입힘으로 또 다른 완성에 도달하길 반복한다. 이처럼 완성과 와해를 넘나들며 작가가 종착하고자 하는 지점은 개념을 위한 회화도, 회화를 위한 회화도 아닌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적 환영이다. 즉, 그는 해석에 반대하는 현상으로써 회화를 추구하고, 텍스트의 정립을 부정함으로 해석이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미지가 선행을 하는 사례도 있지만, 반대로 드로잉의 몸짓에서 비롯된 예측 불허의 이미지들도 있다. 실제로, 오병탁 작가는 자신의 회화를 그저 드로잉의 부산물일 뿐이라고 얘기한다. 그림의 소재로 선택된 대상들은 주로 그가 살아가는 반경에서 발견된 것들로, 이 중에서도 작가는 움직임과 진동같이 고착화된 형태로 표현할 수 없는 역동성에 관심을 둔다. 그렇다 보니 그의 붓질은 격정적이고 속도감이 있으며, 이로 표출된 생동은 파편화된 선과 면으로 휘갈겨져 있다. 구체적인 대상보다 자신 앞에 생경한 세계의 운동을 드로잉의 근거로 삼는 그의 입장은 설치로도 나타난다. 집합된 드로잉을 단일한 덩어리로 바라본다는 작가는 드로잉과 드로잉을 연결하여 드로잉의 규모를 확장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드로잉들을 조직적으로 조립하여 이루어진 총합은 외부 세계의 매개물이 아닌, 드로잉 자체로부터 자생한 풍경이기도 하다.

   신동민 작가 또한 구상보다는 드로잉의 과정이 중대하게 작용한다. 목탄으로 그려진 그의 흑백 형상은 양감을 가진 듯한 착각을 주며, 형상들의 뒤엉킴 때문인지 공간의 시작과 끝이 모호하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특정한 이미지를 전제하지 않고 그리는 순간의 유기성에 몰두하는 편이다. 때문에 대상 자체보다는 그리는 과정 속에서 직관적으로 구현한 형상과 이를 보고 다시 연상한 다른 잔상을 이어 그리는 단계로 화면을 채운다. 목탄의 우발적 표현과 작가의 심상이 결부되어 구현된 존재는 그 근원을 명료하게 지명하긴 어려워 보인다. 근래에 그는 이 알 수 없는 그림 속 형상들을 사각형의 형태로부터 해방시키려고 한다. 그 실체는 아마 다른 모양이었을 거라 짐작한 작가는 그림의 형상을 모양에 따리 찢고 입체로 설수 있도록 구조화를 하여, 실체로 복귀시켜 보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회화의 속성을 극단으로 선언하던 모더니즘 페인팅에 동조하지 않지만, 여섯 명의 작가들은 회화에 대한 입장에선 여전히 회화를 매개의 수단이 아닌 스스로 자명하는 매체이자 세계로 제시하고자 한다. 이들에게 회화의 본질은 평면성 보다는 체계이며, 복합적 성질들(평면성, 환영, 조형, 획, 안료, 지지대 etc.)로 이루어진 체계는 끝내 단언할 수 없는 추적의 대상이다. 어쩌면 실존하는지도 불분명한 회화의 고유성보다, 회화와 현실의 틈새 속에 파생된 회화적 이미지가 각 작가에겐 고유한 것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페인터리 섀도우(Painterly Shadow)>는 역사와 담론에 준거하지 않는 분열된 회화, 실존적 독립을 모색하려는 현장으로 조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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