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제선_주마간산

 

정승운

2012. 5. 4 - 6. 10

정승운의 '공제선'에 대한 몇 가지 의문들 

얼핏 정승운의 작품들을 ‘주마간산’격으로 보면, 그것은 아주 개념적인 조형 언어들의 모임같이 보인다. 먼 풍경의 스카이라인, ‘공제선(空際線)’을 모티프로 한다는 것을 전시의 제목에서 밝혀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종의 법칙성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완결된 형태들과 절제된 표현 방식 때문에, 공제선의 구체성은 나무 합판의 물성과 도형의 추상성에 갇혀 일단 보는 사람을 긴장시킨다. 이 작품들을 감상하기 위해 가슴을 더 많이 열 것인지 머리를 더 열어야 할 것인지 더듬이를 바짝 세우고 얼마간의 시간을 견디고 나면, 엄밀해 보이는 형태들에 눌려 있는, 작가 스스로도 쉽게 드러날까 조심하고 있는 그 무엇이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겨난다. 


예컨대 긴 육면체로 제작된 합판에 칠해진 붉은 색과 검은 색의 붓질은 첫 눈에는 대단히 강렬한 표현성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번 한 번의 손길이 결코 과하지 않게 조절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 색들은 다채로운 물감 튜브들 가운데 선택되거나 팔레트에서 조색된 것이 아니고 먹(墨)과 경면주사(鏡面朱砂)의 검고 붉은 색이다. 먹은 그 안에 모든 색이 다 포함될 수 있는 관념의 색이고, 경면주사는 부적을 쓸 때 사용하는 신비한 홍색으로, 그 세부적인 의미는 차치하고라도 둘 다 선택 가능한 색채들 가운데 하나라기보다는 지나치게 단호한 존재감을 가지는 색 이상의 것이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산의 능선을 재현하기 위해 마련된 육면체의 기하학적 형상과 그 위에 채색된 먹과 경면주사라는 일종의 레디메이드와도 같은 색, 이 조합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뿐만 아니라 벽에 배치된 육각형의 입체물들은 어쩐지 입체물을 가장한 평면 같기도, 평면을 가장한 입체 같기도 하다. 풍경이 하늘과 만나는 지점을 선으로 파악하는 것, 그리고 깊이가 있는 풍경을 근경, 중경, 원경으로 설정하는 것은 두 말할 나위 없이 평면 회화의 방식이다. 그런데 그것을 거꾸로 원경, 중경, 근경의 순서로 배치 수밖에 없는 입체화를 선택하여, 그것을 액자를 연상시키는 프레임 안에 가두어 두었다. 삼차원을 이차원화하는 회화의 방식을 사용하여 그것을 역으로 삼차원화하는 이 과정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란 말인가. 


산 능선의 공제선과 그것의 그림자를 구현한 작품은 두 벽면이 만나는 모서리를 이용하여 1/4원의 원주로 둥글려져 있는데, 이 역시 3차원 공간에 대한 탐구이지만 평면을 이용한 탐구이다. 정승운은 이 작품에 대한 언급 도중에, 모서리에 설치되었던 말레비치의 작품(<The Last Futurist Exhibition of Paintings: 0, 10>전, 1915년, 페테르스부르크)에 대한 흥미를 스치듯이 이야기했는데, 이는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으로 느껴졌다. 절대주의적 공간에서 무한히 떠도는 네모들을 담은 말레비치의 ‘평면’ 작품이 모서리에 띄워져 이차원적 벽면이 아닌 ‘삼차원 공간’을 점유하는 것에 그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방식은 다르지만 그의 4/1원주 작품도 평면과 공간의 관계에 대한 유사한 지점을 가지고 있다. 


의문들, 그러니까 왜 그는 색채와 붓질의 사용에 조심스러운가, 왜 이차원을 구성하는 방법들을 삼차원 공간에 끊임없이 몰아 붙이는가하는 의문들이 이번 전시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제기되는 것이다. 색채와 평면성을 절제하거나 혹은 억제하는 방식은, 채색된 얇은 줄이 현수선을 이루며 공간에 설치된, 또 다른 형식의 <공제선>에서도 보여진다. 이 작품들은 비교적 다양한 색채가 허용되어 있다. 작가는 이 줄에 채색하는 방법이 “마치 캔버스에 그리듯, 그림 그리는 모든 과정을 다 거쳐야 한다”고 말하며 웃었다. 면을 최소한으로 제한하여 거의 선에 가까운 조건을 만들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캔버스를 대하는 것과 같은 그릴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의 웃음은 스스로를 가두는 이러한 제한에 대한 비밀스러운 재미를 떠올리는 웃음 같았다.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가졌던 이들의 입을 빌어 2009년까지의 작품 세계를 되돌아 본 ‘집담회’에서 그는 어떤 견해들에 대해서도 호오를 적극적으로 표하지 않고 그저 그렇게도 볼 수 있겠다라는 식의 포용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가끔 작가에게로 질문이 던져졌을 때에는 작업의 과정에서 마주하는 생각들을 드문드문 드러내 주었다. 예컨대 그는 “벽화와 같이” 공간과 작품이 맞물리는 작업을 지향하며, “그림을 그리게 되면 꼭 캔버스에 그리게” 되지만 그럴 때면 “왜 나는 과거로 돌아가게 되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그는 익숙해 있는 캔버스 작업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만 자꾸만 캔버스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것은 “그림이 형성될 수밖에 없는 특성이자 그림으로서의 공간이 캔버스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캔버스를 벗어나 벽화와 같은 작업으로 가겠다는 작가의 지향점은 앞서 제기한 여러 가지 의문에 답을 찾아나가는데 대단히 중요한 지점이다. 캔버스 그림과 벽화는 이동 가능한 그림과 붙박혀 있는 그림이라는 차이 외에도 기원과 의미에 있어서 큰 차이를 가진다. 구석기 시대의 제의적인 벽화는 차치하고, 인간의 문명이 성립한 이후에 회화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 23~79)의 추정은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회화라는 매체에 담아내는 인간의 관념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플리니우스의 『박물지(Historia Naturalis)』에 의하면 그림의 기원은 사람의 윤곽선 그림자를 따라 그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코린트에 살던 도공 부타데스의 딸이 한 젊은이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데 남자가 전쟁으로 인해 외국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잠들어 있는 애인의 얼굴에 램프 불빛을 비추어 벽에 그림자를 만들어내고는 그림자의 윤곽선을 따라 그림을 그렸고 이것이 그림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는 모든 것의 기원을 그리스 로마 문명의 소산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고대 로마인들의 억측에 가깝지만, 사실인지 신화인지 알기 어려운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평면 회화에 담아내고자 하는 불변의 관념을 엿볼 수는 있을 것이다. 실제 존재하는 것을 그 존재와 관련이 있는 어느 장소에 그린다는 것, 곧 특정 장소와 관련된 벽화가 회화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캔버스는 그로부터 1400년이 지난 후 르네상스 시대의 발명품으로, 나무 패널이나 벽보다 다양한 색을 담아낼 수 있다는 점 이외에도 미술의 후원이나 유통의 문제와 더 관련이 깊다. 그림이 장소를 떠나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은 그러므로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고, 탈장소성의 여러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장소특정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시도들도 최근 몇십년 사이의 일이다. 


그런데 정승운이 지향하는 벽화와 같은 작업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보여준 작품들로 보자면 장소특정적인 작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유학 시기의 설치 작업들(키스톤 원리를 이용하여 공간 속에 입체물들의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내는)이나, ‘집 꿈 숲’ 연작의 시작이었던 신사동 가옥 설치 작품을 제외하면, 설치 유형의 작품들마저도 특정 공간의 공간성을 염두에 두었다기보다는 3차원으로서의 공간성 그 자체에 대한 추상적 관심으로 보인다. 그의 가변적인 설치 작품들조차도 모듈 구조에 의한 확장이나 축소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서, 근본적으로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없는 ‘벽화’가 지향점이라고 하는 언급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벽화’ 지향에서 더 비중을 두어 생각해야 하는 것은 ‘벽(壁)’보다 ‘화(畵)’일지도 모르겠다. 


대부분 조각적으로 보이는 ‘공제선’ 연작은, 그것이 그림은 아닐지언정 그림을 끊임없이 염두에 두고 있다. 그림의 조건인 색채와 평면성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이를 공간과의 연계성 속에서 조심스럽게 다루고자 하는 태도는, 익숙한 것들이 서로를 배반하는 것 같은, 이를테면 억눌린 연애 감정 같은 불편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로서의 자신의 태생적 기질을 억제하고, 익숙한 과거로부터 결별하고, 애쓰지 않아도 편안하게 드러나는 감각을 배반하는 그의 작업 전반에서 보이는 불편함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작업이 브랜드화 되는 것에 대해서도 경계하는, 결코 쉽지 않은, 비-자본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는 관객의 익숙한 기대도 배신하는 것이다. 


그의 ‘공제선’을 배반, 억제, 결별, 절제, 극복의 지점으로부터 다시 보면 오히려 그 작품들이 회화적으로 보인다. 이 키워드들은 그의 작품 형식에서 찾은 열쇠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하지 않은 것들, 이른바 형식이 아닌 내용들, ‘집’, ‘꿈’, ‘숲’, 산과 도시의 ‘공제선’이라는 모티프들에서 느껴지는, 어딘지 로맨틱하면서도 노스탤지어에 가득 찬 주제의식은 그가 선택한 형식과 또 한 번의 긴장감을 형성한다. 그 긴장은 불안하기보다는 대체로 기분 좋은 것으로, 그가 채용하는 단단한 형식들이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내용들을 부패하지 않게 지켜주고 있는 느낌이다. 이제 다시 그의 작품 앞에 서면, 먼 길을 떠나 새로운 여행지의 역에 막 도착한 것처럼, 재미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기대하며 한 걸음을 뗄 수 있을 것 같다.

 

이윤희(미술사)

Some Questions about 'The Skyline' of Chung Seung Un 

 

When glancing at Seung Un Chung’ art works once, his works look like an assemblage of conceptual plastic vocabularies. In spite of the title of the exhibition informing that the art works are based on the motif of skylines, a feeling of tension is firstly aroused when looking at them. Due to their forms seemingly completed by following certain rules and the restrained way of expression, Chung’s skylines seem rather imprisoned in the materiality of plywood and the abstractness of geometrical shapes. Wondering if I should approach them emotionally or rationally in order to have a better appreciation, I start to have a doubt that there might be something that the artist himself is afraid of revealing, something that is hidden behind those precise shapes. 


For instance, the red and black brushstrokes applied on the long boxes made in plywood seem rather expressive at the first time. But when looking closely, you may find that each stroke was controlled carefully. Furthermore, the red and black colors are traditional red for stamp and Chinese ink. These colors made from natural sources are applied instead of pre-existing colors of paint tubes or artificial colors mixed on a palette. The Chinese ink is a conceptual color holding every range of colors inside. The traditional red for stamp is a mysterious red color used when writing amulets. Both of them have a presence that is much stronger and deeper than any other colors. Then, what is the meaning of the combination between these two; the geometrical shape of the hexahedrons where easily recognizable mountain ridges are represented and these ready-made-like colors? Besides, it is ambiguous to define the works hanging on the wall whether their forms are three-dimensional or two-dimensional. 


They follow a typical composition of painting: a skyline between land and sky, and the depth of landscape defined as the foreground, middle ground and background. But he built three-dimensional paintings displaying backward from the background to the foreground and enclosed them in a frame. If painting is a way of representing three-dimensional objects in two dimensions, in his works, he chose the composition and characteristics of painting in order to bring them back to three dimensions. How can we interpret this inversed process? 


The piece representing a mountain ridge and its shadow is rounded as a ¼ sphere on the corner where two walls meet. This installation is also a study on the three-dimensional space using a flat surface. While talking about this piece, Chung briefly mentioned about a work of Malevich presented in <The Last Futurist Exhibition of Paintings: 0, 10>, Petersburg, 1915. It seemed to me as an important point to understand Chung’s art work. He was interested in the way how Malevich’s ‘flat’ work representing squares floating in an absolute space was installed at a corner occupying a ‘three dimensional’ space rather than a surface of a wall. In a different way, his ¼ sphere piece also deals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dimensions and space.

There are several questions in common occurring in the works presented in this exhibition; why is he so careful with his colors and brushstrokes? And why does he keep constantly applying two dimensional components into the three-dimensional space? The way of moderating or restraining colors and the characteristics of two dimensions are also used in another piece <Skyline> where thin painted strings are installed in a space drawing catenaries. Various colors are used in this installation. The artist laughed when he said ‘I should go through every process of painting, just like painting on a canvas.’ It seemed like he finally finds freedom to paint after minimizing the surface to paint till it becomes a thin string. His laugh seemed bursting out of recalling his secretive game which consists of voluntarily restraining himself. 


The artist’s attitude during the round table gathering people interested in his art work in order to review his works till 2009 seemed quite tolerant accepting the others’ comments rather than expressing strong likes or dislikes. But he sometimes revealed his thoughts on the process of making his work when someone asked him questions. For instance, he aims to create a unity of an art work and the space where it is placed like a ‘mural painting’. Besides, ‘when painting, he always paints on canvas.’ but when it happens, ‘he worries about turning back to the past’. He would like to get away from the canvas, but he keeps turning back to it as he thinks that ‘the nature of the canvas is to support painting and the space of painting is the canvas.’

 

The artist’s direction to go for a work like a mural painting instead of using canvas composes a very important base to look for various questions that I have previously made. Besides the different possibilities of mobility, there is a big difference in terms of the origins and meanings between paintings on canvas and mural paintings. Leaving the Stone age’s ritualistic murals aside, the explanation given by Gaius Plinius Secundus(23~79) on the origin of painting created after the foundation of human civilizations allows us to understand thoughts of humans who express through paintings. According to Plinius’s ‘Historia Naturalis’, the origin of painting started from drawing the contour of humans’ shadow. The daughter of Butades, potter living in Corinth, fell in love with a young man. When he had to leave abroad due to a war, she casted light of a lamp on her lover’s face while he was sleeping. Then, she drew the outline of the shadow made by the lamp. This story is considered as a base to explain the origin of painting. It is obviously just a speculation of the ancient romans who tried to make everything as the fruit of the Greek and Roman civilizations. But it is possible to get the unchangeable concept of painting through this story, which is hard to distinguish rather it is a true story or a mythology. The story tells us that the beginning of painting is to paint an existing element on the related place, therefore, a mural painting related to a specific site. Canvas is a product invented during the period of Renaissance, 1400 years later since then. It matters more with the issues of art sponsoring and distribution besides the possibility of supporting more various colors than wooden panels or walls. It hasn’t been that long that painting started to travel. Also, it is within the last decades that the attempts to recover the ‘site specific’ character of painting have been being made in order to solve several problems of ‘no placeness’. 

However, when looking at the works that he has shown till now, it is hard to consider Seungun Chung’s ‘mural-like-work’ as site specific works. Except the installation works (creating strong tension among objects by using the principle of keystone) made during his studies abroad and the piece installed at a house in Sinsa-dong, which triggered later the series of ‘House Dream Forest’, his works following the format of installations seem rather as the expression of his interests in abstractness of the three dimensional space. As even his installation works in variable dimensions carry out the possibility of expansion or reduction by its structure in modules, the comments on his intention aiming for a ‘mural-like-painting’ seem not very convincing, as a mural painting, by its nature, can’t be removed from or attached back on the wall. Therefore, more values should be attached to the ‘painting’ when thinking of a ‘mural painting’, rather than the word, ‘mural’.


The series of ‘Skyline’, mostly taking the appearance of sculpture contain aspects of painting although they are not. Based on the characters of painting as color and two dimensional surface, they are carefully placed in the connection to the space arising an uncomfortable feeling as if familiar things seem betraying each other, in other words, like the restrained feeling of love. This uncomfortable feeling is felt in his work in general, which takes an attitude suppressing his temper given from the birth as an artist, separating from his usual past and betraying the expected comfortable feelings that reveal effortlessly. Besides, his anti-capitalist attitude prevents him to commercialize his work as a brand. He even betrays usual expectations from viewers.

 

When reviewing his ‘skyline’ series through keywords such as betrayal, suppression, separation and recovery, they appear as paintings. These keywords are found from the format of his art work. However, the things that are unsaid here, for example, the contents rather than the formats, the romantic and nostalgic subjects such as ‘house’, ‘dream’, ‘forest’ and ‘skyline’ of mountains and cities draw a feeling of tension again encountering the format that the artist had selected. This feeling of tension is mostly pleasant instead of being anxious and it seems like the solid format of his work keeps his sweet and soft stories away from decaying. If I get to face his work again, I think I will be able to expect the beginning of a fun experience, as if I have just arrived in the station of a new destination from a long journey.

 

Yoonie Lee(history of art)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마을길 92 갤러리 소소

​T. 031-949-8154 E. soso@gallerysoso.com

copyright © 2007-2019 gallerysoso.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