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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와 저기 그 사이 어디에 관하여

 

홍범

2019. 11. 30 - 12. 29

그는 이곳과 저곳 사이 어디엔가 있다

 

“우리는 선이다. 이 혼란스럽고 거대한 우주의 조금 특별한 모퉁이에서 세상의 일들이 뒤섞이면서 남긴 흔적들,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견하고 엔트로피를 성장시키도록 맞춰진 그 흔적들이 만들어낸 선들이다.”1 카를로 로벨리

 

홍범의 작업에 대한 나의 인상은 명멸하는 점으로 이루어진 드로잉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를 안지는 오래되었지만, 밤하늘의 별자리나 고대의 신비로운 지도 같기도 하고 거미줄 혹은 색맹검사를 위한 기호들이 모여 흡사 뇌신경처럼 예민한 선들로 진화되는 듯한 그 이미지의 기원을 이해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2018년 아르코미술관의 ≪옵세션≫전의 <0과 1 사이의 포물선>(2018)에서 홍범은 자신에게 친숙했던 실제 공간들에 대한 기억들을 디지털 이미지로 다채롭게 변주한 가상의 공간들을 영상으로 구현했다. 이 작업은 필자에게 각인되었던 점묘 드로잉이 잠재된 그의 기억들에 대한 일종의 지표이며 떠도는 기억 속 이미지들을 위한 최소한의 정착지임을 알려주었다.

실상 그간에 열렸던 일련의 개인전들에서 확인되듯이, 홍범의 작업은 매우 일관적인 주제의식을 가지고 단계별로 진화되어 왔다. 서울과 뉴욕을 오가면서 활동하는 그에게 있어서 장소에 대한 여러 기억들은 종종 혼재되면서 사실관계에서 떨어진 채 부유하고 서로 침투한다. 더 나아가 기억들 간의 새로운 연결점과 매듭을 형성하며 마치 세포분열하듯이 새로운 형국으로 진화하기도 한다. <잃어버린 숲>(2007)에서 나타났던 점들은 <알 수 없는 순환>(2011)에서 회로와 같이 입체화된 선이나 길과 같은 형태로 확장되면서 순환하는 운동감을 얻게 되었고, <술래잡기>(2012)에서는 파이프와 거울을 이용한 설치와 영상작업으로 구현되면서 물리적 실체감을 가지는 다차원적인 구조물이 되었다. 유령같이 떠다니는 기억 속의 공간들은 <5개의 방>(2014)에서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가상공간으로 시각화되면서, <방문>(2016)에서는 한층 더 복잡한 빛과 그림자의 효과와 음향, 움직임을 통해서 시지각적 현실성을 획득했다. 이러한 작업들의 연장선에 있는 갤러리 소소에서의 이번 개인전을 위해 홍범은 기존 작업 속에 등장했던 기억의 잔해를 의미하는 종유석 혹은 식물 화석과 같은 형태들, 오르골, 점묘 드로잉, 디지털 가상공간을 이용하면서 한층 더 정교해진 영상, 설치 작업을 통해 인식과 기억, 시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갤러리 소소의 1층에 전시된 <산책의 결>(2019)은 작가가 바라본 시점을 따라 360°로 천천히 회전하는 스크린 위에 유기체 덩어리, 동물 형상, 사물의 파편 같은 흰색 드로잉들이 무작위하게 출현하고 사라지는 작업으로, 현실의 풍경을 바라봄과 동시에 촉발되는 기억이나 상상을 시각화하며 이번 전시의 중심 주제를 던져준다. 이 풍경을 보는 관람자들은 작가의 눈이 순수하게 3차원의 공간만을 보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는 눈에 보이는 풍경 속 어느 장소에 서 있지만, 동시에 그 풍경 위에 엷은 막처럼 부유하는 또 다른 차원 안에 속한 듯하다. 그 차원은 가시적 현실 위에 평행으로 떠다니며 때때로 연결점을 형성하지만, 그 연결 관계는 자의적이며 불특정하다. 작가의 시점을 따라 어디에나 편재하지만, 어디에도 그것을 위한 확고한 자리는 없다. 이 작품에서 현실 풍경 위에 오버랩되는 드로잉 선들처럼, 홍범에게 있어서의 현실과 기억과 상상은 각자의 역동성을 잃지 않은 채로 어떤 초공간 안에서 얽히고 중첩된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에 서서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에게 있어서의 ‘현재’는 현실인가 기억인가 상상인가? 일종의 섬망적 상태를 만들어내는 이러한 인식 상에서 과거-현재-미래의 선형적인 시간 개념은 무용해진다.

시간의 물리적 구조를 분석한 현대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우리 자신이 “이 공간, 우리 신경들의 연결 속 기억의 흔적들에 의해 펼쳐진 초원”2이라고 이야기한다. 그의 관점에 의하면 우주에서 공통의 현재는 존재하지 않으며, 시간은 물질들이 만들어내는 사건들의 관계망과 그 동역학을 경험하는 우리의 관점 혹은 내적 감각에 의해 출현한 것이다. 홍범의 작업 속에의 시간 역시 작가의 경험이 인식 영역에 자리 잡게 되는 자의적인 순서에 의해 형성된다. 오래된 난간을 활용한 설치작업 <생각의 균형>(2019)에서, 난간을 타고 모터로 계속 돌아가는 잔해와 같은 형상들이 매우 천천히 이동함에 따라 난간의 무게 중심은 계속 뒤바뀐다. 난간은 고정된 지표 없이 부유하는 기억처럼 이동하며, 위계도 순차도 없고 오직 어떤 역학적 방향성만 가진 채 마치 자생적인 생명체처럼 스스로 균형을 잡아나간다.

100년 된 목조 오르간 파이프로 만들어진 홍범의 <흐르는 상념 2>(2019)에서, 관람자인 나는 아날로그 기계가 별자리 같은 점들을 천천히 읽으면서 만들어내는 오르골 음향을 통해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있는 어떤 시공간을 떠올린다. 현실 공간에 대한 경험과 중첩되는 이 기억의 효과는 잠시 우리가 있는 현재의 위치를 희미하게 만들면서 이곳도 저곳도 아닌 시간의 틈새 같은 공간을 임의적으로 만들어낸다. 오르골의 리듬에 맞춰 세포가 증식하듯 끝없이 변주되는 만화경 이미지를 볼 수 있는 <바라봄>(2019)에서는 마치 기원도 끝도 알 수 없는 시간의 회로 안에 갇혀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작가 자신에게 중요한 과거의 기억을 조명하는 미니어처 극장이라 할 수 있는 <두개의 순간>(2019)에서는 출구가 없는 시공간 안에 영구히 숨겨놓은 듯한 기억이 끊임없이 공명된다. 특히 이 작업은 기억의 시공간을 터널로 형태화해내고 그것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마치 액자구조와 같은 중첩된 시점 설정을 통해서 인간의 인식 속에 살아있는 기억의 상태를 공간적으로 구조화하려는 홍범의 관심사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초현실주의자 로베르토 마타(Roberto Matta) 역시 정신적 영역에 시공간성을 부여하는 작업을 한 바 있다. 마타는 인간 내면의 심리적 충동이 자연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물질계에 작용하는 물리적 힘을 지니고 있으며, 역동적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리얼리티는 율동적으로 진동하고 회전하는 상태 속에서 스스로를 형태화하는 폭발적인 경련의 연속”3이다. 우주의 구조에 대한 푸앵카레(Henri Poincaré)의 수학적 가설과 우스펜스키(P.D. Ouspensky)의 영적 신비주의를 함께 받아들인 건축가 출신의 마타는 보이지 않는 정신적 에너지를 건축 구조처럼 형태화했고, 심리현상을 시각화하는 자신의 방법론을 ‘심리적 형태학(psychological morphology)’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무의식 안에서 무형으로 흘러 다니는 비물질적인 기억과 욕망이 만들어내는 사건의 역학을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통해 공간화한 것이다.

유동적인 정신의 상태를 시공간의 조형어법으로 구조화한다는 점에서 홍범의 작업도 마타와 유사한 점이 있지만, 홍범은 실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기억이 상상과 환영과 뒤섞이면서 꿈처럼 자체적인 리얼리티를 갖게 된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그는 현재엔 존재하지 않으며 그가 살았던 도시들 사이에서 떠다니는, “그 자체로 독립되어 이젠 어느 공간에 머물기엔 너무 커져버린 그 기억들과 그 기억들 사이의 관계”4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비워진 공간>(2019)에서 실제 살았던 과거의 집처럼 기억 속에 있는 단편적 요소들을 그래픽으로 창조하고 합성하여 가상공간으로 구현했다. 이러한 영상은 현실에는 더 이상 없으나, 인식 상에서만 남아있는 기억이라는 비물질적인 이미지에 대한 효과적인 은유가 된다. 방, 다락, 창고, 혹은 교회나 감옥 같기도 한 다양한 공간들은 기능적 정체성도 경계도 없이 끝없이 이어지며 변주되고, 순차적인 시간 순서와 무관하게 흡사 미로처럼 연결되면서 아래로 끊임없이 하강한다. 그것들은 기억 속에서 새롭게 조직된 연결망들의 나열로서의 시간 개념을 획득하면서, 잠재의식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어떤 지점을 향해 가는 듯하다.

이러한 홍범의 작업은 기억과 상상과 환영, 즉 현실과 관련되면서도 그것과는 떨어진 상태에서 분명하게 우리 안에서 지속되는 정신적 활동의 실재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병풍구조로 펼쳐진 <한 도시에 대한 기록>(2019)에서 홍범은 검은 종이 위에 흰 색 점을 찍어 마치 바다 속을 유영하는 해파리나 원생동물, 혹은 휘발성 연기 같이 직조된 형상들의 비선형적 파노라마를 만들었다. 파동과 같은 이미지들은 순차적인 시간 개념과 무관하게 인식의 영역 어딘가에 쌓였다가 다시 어딘가로 이동하는 유동적인 기억의 잔재들일 것이다. 그것들은 홍범의 인식 상에서의 점에서 선이 되고 풍경이 되는, 소멸되고 생성하기를 반복하는 불연속적인 작은 입자들일 터이지만, 그 입자들은 시간의 순서가 무의미한 뫼비우스 띠 같은 공간 속을 부유하다가 어느 순간 현실을 밝히는 한 파편이 되어 별처럼 빛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주처럼 광대한 정신적 시공간 안에서, 마치 고대 천문학자들이 별을 보고 미래를 예측했듯 홍범이 예술작업이라는 복잡하고도 세밀한 길을 찾아 나가는 좌표가 되는 것이다.

 

이은주 (독립 기획, 미술사)

1 카를로 로벨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이중원 역, 서울: 샘앤파커스, 2018, p.195

2 카를로 로벨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이중원 역, 서울: 샘앤파커스, 2018, p.208

3 Martica Sawin, Surrealism in exile and the beginning of the New York school, Cambridge: MIT Press, 1995, p.29. (Martica Swin에게 전해진 Roberto Matta의 원고 중에서 발췌됨.)

4 갤러리 소소 전시를 위한 작가의 글 중에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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