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 밭, 후쿠시마

 

허윤희

2012. 3. 23 - 4. 22

허윤희는 이번 개인전에서 짙은 목탄으로 그린 200호 크기의 드로잉 연작 두 점을 선보인다. <그날 밤 별이 유난히 빛났다> 와 <부서진 발>이라는 제목을 단 이 드로잉들은 일 년 전 동일본대지진 당시 원전 사고가 난 후쿠시마를 소재로 하고 있다. 이들은 재앙 직후 후쿠시마의 참담한 정경을 부감의 시각에서 상상적으로 재구성한다. 유난히 빛나는 밤하늘의 별, 그 아래 도시를 휩싼 괴괴한 어둠과 쓰나미에 휩쓸려 떠다니는 마을과 집들, 멀리 핵발전소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로 휩싸인 산과들 그리고 쓰러져 엎어진 발. 화면은 우리를 그저 망연자실 바라보는 가운데 깊은 의문과 질문에 빠져들게 만든다. 

그녀의 이번 개인전은 2009년 이후 3년만이다. 이 3년 동안 그녀에게는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난듯하다. 유학시절(1996-2003)부터 바로 직전 개인전까지 그녀의 관심은 개인의 실존, 그 내면의 삶에 집중돼 있었다. 홀로 내면 속으로 침잠해있는 영혼, 인간 사이의 갈등과 억압과 상처로 인한 절망, 삶의 메마름과 갈증을 치유해줄 생명의 따스함에 대한 희구, 혹은 해방, 유영, 비상에 대한 갈망, 뿌리 뽑힌 생활로부터 확인한 삶의 유동성(여행)에 대한 자각 같은 것들이 이 작업들의 모티브였다. 


이 작업들의 매력은 이 같은 모티브들을 자연 사물과 결합시킨 특유의 시적 은유에 있었다. 내뱉은 말은 꽃이 되어 땅으로 떨어지고, 한 얼굴에서 나온 다른 얼굴이 나무의 과실이 되어 열리며, 바람 불어 위를 향한 머리카락들이 나무숲으로 변신하는가 하면, 한 여인이 내면의 소리를 들으려 대지 위에 귀를 대는 식의 독특하고 절실한 상상력. 이 드로잉들은 일종의 범신론적 자연관에 조응하는 하나의 세계, 즉 인간 삶과 자연의 운행이 서로 어긋나면서도 합일하는 하나의 세계를 제안한다.


그녀의 이 같은 작업에 내가 눈뜨게 된 것은 최근에서다. 같은 등산모임 회원으로 산을 오르기도하고 이런저런 일상을 나눈 지 수년이 됐지만, 나는 그녀의 작업을 그냥 스쳐 지나쳤던 것 같다. 그러나 얼마전 그 드로잉들이 나의 몸체 어딘가를 찔러 들어왔다. 개인의 고통과 열망을 표현함으로써 자기 치유를 시도하는 그 작업들은 궁극적으로 그 모든 생명의 몸짓들이 지닌 아름다움에로 우리를 이끄는 듯했다. 

2006년 허윤희는 소마미술관의 커다란 벽면에 안쪽으로 호수처럼 물이 고인 커다란 배추 하나를그리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오랜 독일 유학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긴 비행의 여독을 풀고 혼자 동네 시장구경을 간 날, 오전의 햇살이 가볍게 빛나고, 채소가게에는 배추가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흙 묻은 배추 다발 앞에서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항상 먼 곳을 동경하고 멀리 떠나려고만 했던 나. 그래서 늘 물을 그렸고, 그 물은 밖에서만 출렁거렸다. 이제 그 물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 개인전에는 이 때 그린 배추 그림이 유화 연작으로 등장한다. 이제 그녀의 메말랐던 내면에는 물이 고이고, 그녀는 일상의 비속한 아름다움에로 걸음을 내딛은 것인가? 또 다른 연작<시든 배추>는 마치 이 같은 아름다움을 구현한 듯하다. 이번 전시의 발 연작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전의 발 드로잉은 땅을 디딘 발 위로 나뭇가지가 자라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 발이 땅 밑 어둠을 파고드는 것으로, 그리고 그 어둠을 견뎌낸 상처로 인해 빛나는 것으로 그려진다. 


배추, 발, 후쿠시마를 주 소재로 한 이번 개인전은 이 같은 변화의 귀결일 것이다. 그녀는 눈의 초점을 내면으로부터 좀 더 구체적인 현실, 일상으로 이동시킨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자신이 위치한 이 곳, 현재를 바라본다. 이제 그녀는 홀로 외로운 영혼이 아니다. 삶의 유동성에 대한 자각은 인간 삶이 유한하다는 깨달음으로 더 풍요로워지고, 생명의 따스함과 비상에 대한 갈망은 더불어 사는 우리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으로 안정을 찾은 듯하다. 


후쿠시마 연작은 이러한 변화의 한 극점을 보여준다. 은유와 묘사, 변형과 과장을 동시적으로 활용한 이 드로잉들은 목탄이 구사하는 빛과 어둠의 대조를 통해 파국을 제시한다. 여기 파국이 있다. 유한한 인간의 무한한 욕망이 낳은 재앙, 별은 유난히 빛나고, 부서진 발 위로 검은 연기가 모든 것을 뒤덮는다. 그리하여 이곳에는 애정도 연민도 심지어 외로움도 자리할 구석이 없다. 나의 눈은 드넓은 우주 안에 떠있는 듯 크고 작은 별들의 흐름과 배치 그리고 상처 난 발의 밝게 빛나는 부분 그리고 발의 윤곽이 산의 능선과 겹쳐지는 지점에 머문다. 그녀는 마치 질문을 던지는듯하다. 나와 우리의 일상과 평화는 이 현실 속에서 이렇듯 위태로운가? 

허윤희는 내게 요 몇 년간 녹색사상을 접하고 거기에 깊이 빠져들었다고 이야기한적이 있다. 아마도 그녀의 변화는 이러한 영향에 힘입은바 클 것이다. 하긴 그녀의 작업이 보여주듯 그녀만큼 자연과의 친화력을 보여 온 작가는 많지 않다. 때문에 이 같은 변화는 그야말로 자연스럽다. 우리들 삶의 근거이자 행복의 구체적인 지평인 자연과 환경의 중요성에 대해서 어떤 말을 더 할수 있겠는가! 


그녀는 또한 자신의 작품의 변화를 "나로부터 우리로" 라는 말로 요약하기도 했다. 예술은 분명 나를 우리로 이끄는 통로다. 그러나 예술은 나에 기반하지 않은 우리를 거부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사상이건 예술이건 그 어떤 것도 새로운 역사, 새로운 정체성을 발생시키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비록 오늘날 변화와 새로움과 이동에 대한 많은 구호들이 그 이동과 변화를 배치하고 새로움을 활용하는 권력의 필요에 따른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녀의 작업은 나에게 여러 질문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영욱(미술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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