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산책

 

김기수

2011. 11. 25 - 12. 31

「밤 산책」 또는, B씨와 ㅎ씨를 따라, 배움의 산책 

김기수의 이번 전시는 회화전이다. 4-5년마다 열리는 그의 개인전을 지켜본 나에게는 매번 그 변화의 진폭이 크고 깊게 느껴진다. 2001년 개인전에는 변두리 지역의 옥상에 테이핑한 장면과, 운동장이나 놀이터에 흙으로 '경계탑'을 세운 광경 등을 찍은 사진 및 실물들이 전시되었고, 2006년 개인전에는 광주대단지 재개발 사건을 둘러싼 기록과 기억을 다양한 매체로 재구성한 작업들이 등장했다. 이 두 전시에서도 작품제작 방법과 전시공간을 해석하는 시각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작가가 세상에서 살아갈 뿐 아니라 다른 '삶의 가능성을 고안'하는 경로로서 자신의 작업방향을 설정하는 데서도 적지 않은 변화가 감지되었더랬다. 앞선 개인전에서는 작품이 세계와 만나는 실공간(실시간이라는 개념에 조응하는)의 저변을 보다 넓게 확보한다는 측면에서, 버려졌거나 일시적으로 텅 빈 장소 속으로 작가가 선택한 '물질의 구조'를 던져 넣는 방향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나중 전시에서는 잊었거나 강제로 억압당한 '기억의 물질'을 전시장이라는 추상화된 공간 안에 실재하도록 호명해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방향의 힘이 원심력에 의거하든 구심력에 기초하던 간에, 작가 주체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물질의 자발성을 신뢰한다는 사실, 그리고 현실의 구체에 대한 낙관보다는 형태의 정교성 탐구에 열중한다는 점 또한 공통으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공통점은 생래인 동시에 훈육으로 습득한, 일종의 작가적 특이성으로 이번 전시에도 은연중 발현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새삼스럽게 그가 회화로 '돌아선' 까닭은 무엇일까? 사실 이 질문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지금에 와서 그림이냐 영화냐하는, 매체의 본질에 따르는 문제로 작업을 구분하고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미디어아트건 회화건 간에 동시대 미술이, '현실의 궤적'을 추수追隨하기보다는 '현실을 프로그래밍'하려고, 선회旋回하고 있는 현 상황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할 때, 김기수의 작업이 변화하고 있는 국면이 보다 명확해진다면, 그리하여 이 작가의 특이성을 훨씬 효과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다면 나름대로 의미는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이번에 전시한 그림들을 그리면서 김기수는 세계를 구성하려는 의지보다는 그것을 풀어헤치고 그 사이로 얼핏얼핏 어떤 '영토'들을 드러내려는 바램을 실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선은 김기수가 잡아낸 회화의 앵글이 그렇다. 사물의 부분이나 장소의 외곽을 노출시킨 그림들은, 다분히 카메라 프레임에 기대고 있지만 그와는 다르게, 응시가 아니라 사시斜視로 보게 한다. 이는 단지 초점이 맞지 않는다는 차원을 넘어서, 작가가 공간의 균형감이나 밀도 또는 색채의 조화나 질감 등을 전체 화면의 이질성을 확보하는 쪽으로 몰아간다는 뜻이다. 분명, 김기수는 서양 낭만주의 작가나 전지적 동양 고전주의 작가의 시선으로 회화를 소환하려고 시도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현상학과 구조주의 핵심으로 그림을 '재영토화' 하고 있다고 해석할 여지도 크지 않아 보인다. 앞선 시대들을 배워 알고 있는 작가로 그가 회화에서 주목하는 새로운 주체의 영역과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차라리 『카오스모시스Chaosmosis』*에서 펠릭스 가타리가 말했던 바에 가깝다. 곧 사고의 이데올로기와 범주에 의해서 형성된 집합적 기능 체계 안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배열과 작인agency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주목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김기수의「밤 산책」은, 휘황찬란한 도시의 어둠 속을 훑고 다니며 여러 갈래 길을 내고 있는 '길냥이'들의 감관을 참조하여, 우리 속에 회화적 생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새 기계들을 작동시키려 한다. 

이 기계가 효과적으로 작동되면서, 김기수의 그림은 사시로 보던 세계를 활성시킨다. 가타리가 예술작품은 눈을 정지시키지 않는다고 했을 때 나는 이런 뜻으로 이해했다. 예술작품이, 그 주위에 주체성의 상이한 요소들을 결정화하여 새로운 소실점을 향해 재분배하는, 미적 보기 방식의 마술적이고 최면적인 과정에 기초한다면, 이는 김기수가 북한산 안팎을 넘나들며 그린 풍경화에도 해당한다. 산에 한번이라도 가본 사람은 잘 안다. 산을 타며 흔히 보는 풍경, 불쑥 다가왔다 어느 순간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곤 하는 <봉우리>들은, 나의 이동보다는 도리어 세계의 움직임을 몸으로(단지 눈이 아니라) 체험하게 해준다는 것을. 그리고 그 세계의 이동에는 제각기 내 몸의 상이한 구성요소들이 반응하고 있음을. 한편, 이것은 자연이 주는 희귀한 체험인 동시에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의 정수精髓에 해당할는지 모른다. 도심을 가르며 북한산이 솟아있고, 또 그 산을 오르는 수많은 등산객들이 다시 도시로 내려와야 하듯이, 산속의 영기는 분리된 것이기는커녕 범속한 삶과, 불연속적이지만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김기수는 그림이란 이런 상이한 세계에 대한 체험과 지식, 감정, 판단 등을 연결하는 지지대일 뿐 아니라 그것들이 종종 돌연변이로 튀어 오르게 만드는 도약대와 같은 것이라고 파악하는 듯하다. <세검정>의 검은 물이나 <바위3>의 푸른색 배경, 그리고 <밤 산책4>의 발광하는 성벽과 <벽>의 흐릿한 무늬 또는 <사모바위>의 크랙 등은, 그리하여 그것을 보는 우리를 밀어내고 스며들게 하고 홀리고 흔들고 빠지게 한다. 작두대가 설치되어 있는 <국사당>에서 솟구치고 있는 저 매혹과 위험에 가득 찬 미지의 세계는, 무의식일수도 분자일수도 영성일수도 혹은 혁명의 에너지일 수도 있는, 제각기 유동하는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자신을 초월하도록 추동하는 그런 문제가 아름다운 것'이라는 니체의 바이탈리즘vitalism은 이 도약대에서 정신-생태학적 어휘의 영역으로 튀어 오른다. 김기수가 북한산 주변을 오르내리며 그린 풍경화들이, 자연 경관을 그린 그림이라기보다 우리시대의 그림에 관한 풍광으로 보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화가 민정기를 따라 그림이야말로 「본 것을 걸어가듯이」 만드는 그 작인이라고 할 때, 그리고 그렇게 활성된 그림이 동시대 정신-생태의 경치들을 재배열할 때, 비로소 <주차장>과 <신영문구>에는 불이 반짝 켜진다. 예술 활동의 핵심은 언제나 환경의 범속성에 예측불허의 점등을 하는 것!


한때, 김기수는 아티스트 콜렉티브, 플라잉시티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2001년에서 2002년 사이 그가 참여했던 플라잉시티 작업에는 도시 '심리지리' 워크숍과 디지털합성사진 <굽어보기> 그리고 <북악산에서 외치다>라는 비디오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작업의 주제나 매체들의 특성 혹은 작업 하면서 만났던 사람이나 해당 장소에 대한 경험이 그림을 그리는 그에게도 당연히 축적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작업을 공동으로 수행했던 그 시간 자체가 작가의 몸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가 더 궁금하다. 대화와 조정의 건설적이면서도 소모적인 과정, 또는 간간이 형성되었던 공감대와 완성과 실패를 가르는 미세한 의견차들은, 딱딱해지기 쉬운 작가의 육체를 한층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유연해진 몸으로 지금 그는 그림을 그린다. 그렇다면 그의 회화는, 한 명의 개인에게 수많은 고유명사를 부여했던 원시사회의 실천을 모방하여, 여러 주체가 공존하고 부재하며 병렬하며 제곱하여 완성되는, 이를테면 페인팅 콜렉티브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 어쨌든 분명한 것은 그가 그림은 위기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지구를 뒤덮고 있는 거대한 이 위기가 미적이며 윤리-정치적인 횡단을 위한 발을 내딛도록 작가를 추동했기 때문이다. 물론 한 장의 그림에 또는 하나의 회화전에서 과연 어떻게 '창의적인 개성과 잠재적인 사회적 돌연변이'를 세팅할 수 있을까'하는 질문에 대해선 정답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김기수의 「밤 산책」은 그 답을 스스로 찾아내도록 배움의 산책에 나서자고 우리를 청한다.  

 

백지숙(미술평론, 전시기획)

* 여기 실린 펠릭스 가타리의 글들은 아래 책에 근거한다. 
Guattari, Félix. Chaosmosis : an ethico-aesthetic paradigm. Indiana University Press, Bloomington & Indianapolis.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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