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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와 알맹이
Shell and Pearl


김사피, 김신형, 심경아, 이수민, 정서현, 정지원
김형관, 갤러리 소소 공동기획
더 소소

2026. 2. 27 - 3. 27

 

나에게만 크게 부풀어 오르는 것들

 

 

남들에겐 아무 일도 아니지만, 나에게만 유난히 크게 부풀어 오르는 것들이 있다. 말로 꺼내기엔 모호하고 설명하기엔 아직 형태가 없어 대개는 안쪽으로 깊숙이 밀어 넣게 되는 것들. 이번 전시 《껍데기와 알맹이》에 참여하는 김사피, 김신형, 심경아, 이수민, 정서현, 정지원은 저마다의 ‘알맹이’를 ‘작품’이라는 껍데기에 담아 세상 밖으로 꺼내 놓는다.

누군가는 껍데기의 물성에 집중하고, 누군가는 그 틈새로 비치는 알맹이의 본질을 내보인다. 그러나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수단인지 묻는 일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껍데기는 바다 위를 떠다니며 외부의 흔적을 덧입고, 일순간 벌어진 틈새 사이로 침입한 이물질은 알맹이를 부풀리기도, 깎아내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전시는 그렇게 개인적인 경험과 감각이 형식이라는 옷을 입고 외부로 드러나는 과정을 천천히 더듬어가는 여정이다.

 

침잠하는 선, 좁은 판 위에서 길어 올린 애도

이수민의 작업은 비교적 작은 판 위에서 시작된다. 이는 필요에 따른 선택이라기보다는 아픔에 대한 공감에 가깝다. 세계가 요구하는 속도와 효율에서 미끄러져 나온 몸, 더는 나아갈 수 없었던 멈춤의 상태를 그는 좁은 면적에 눌러 담는다. 위로 솟구치기보다 바닥을 향해 침잠하는 선들은 무언가를 극복하거나 증명하려 애쓰지 않는다. 오히려 아픔을 있는 그대로 눕혀두고, 니들(needle)로 에칭판을 긁으며 살을 에는 듯한 감각을 공유할 뿐이다.

그의 작업에서 알맹이는 ‘일상의 이물감’이라는 형태로 발현된다. 삶의 비극은 때로 지독하게 평범한 순간과 결합하기 때문일까. <계란말이가 있는 적당한 식사> 속 '적당한 일상'은 오히려 기괴할 만큼 비대해지며 우리를 찌른다. 이를 닦고 신문을 읽는 평범한 순간들 속에 특별한 이유 없이 밀려드는 이 통증은 무엇일까. 작가는 거창한 이야기를 꺼내 드는 대신, 가볍고 때로는 무심한 얼굴로 파도처럼 덮쳐오는 슬픔에 공감한다. 일상성이라는 가벼운 표면 아래,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서늘한 징후들을 심어두는 것. 그것이 판화를 대량 생산의 도구가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애도의 방식으로 선택한 이수민이 알맹이를 간직하는 법이다.

 

기억을 찌르는 푼크툼(Punctum), 그날의 공기

심경아의 작업은 오늘날 가장 익숙한 이미지 생산 방식인 사진에서 출발한다. 이 사진들은 20–30대 여성들의 사진첩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장면들과 닮아있다. 복작복작한 카페, 부딪히는 와인잔, 사랑스럽고 친밀한 수다. 수없이 눌리는 셔터와 늘어나는 이미지 파일은 쉽게 생산되지만 그 안에 담긴 공기마저 가벼운 것은 아니다. 사진을 다시 보면 구체적인 사건보다 그날의 공기가 떠오르고,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공간의 색감과 웃음이 번지던 분위기만은 또렷이 남는다.

작가가 선택하는 이미지 역시 명확한 서사를 갖지 않는다. 그 대신 작가는 함께임을 암시하는 손짓, 남겨진 사물, 특정한 색감처럼 사소한 요소들을 화면에 배치해 관객의 마음을 조용히 두드린다. 그것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강조한 메시지라기보다는 기억 속에서 끝내 지워지지 않고 남아버린 디테일에 가깝다. 작가는 말한다. “쉽게 찍을 수 있는 시대이기에, 오히려 이미지를 다시 물질화하는 과정은 더욱 중요해진다.” 그가 디지털 데이터라는 가벼운 껍데기를 버리고, 사진을 고르고, 이들을 겹치고, 다시 캔버스라는 물질적 토대로 옮기는 행위는 그 '찌르르'한 감각을 더 오래 간직하려는 애틋한 시도이다. 이렇게 그의 작업은 단순한 시각적 기록이 아니라 내밀한 기억과 감정을 호출하는 장치가 된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정서현의 작품은 안과 밖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어린 시절 숨바꼭질을 하며 커튼 속으로 몸을 말아 넣던 기억. 남들 눈에 내가 보이지 않으면 내가 사라진 것이라 믿어도 될 것 같던 묘한 공기.

작품 속 이미지는 작가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엄마의 오래된 사진에서 출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특정한 장면을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여러 번의 드로잉을 거치며 기억은 오히려 조금씩 멀어지고 흐릿해진다. 그렇기에 그의 작업은 과거의 정확한 복원이라기보다는, 소멸해가는 기억의 형태를 더듬어 되살리는 과정에 가깝다. 아크릴과 코튼이라는 재료는 이러한 태도를 물질적으로 드러낸다. 물감을 머금은 표면은 서서히 스며들고 퍼지며 경계를 흐린다. 화면 속 인물은 중심에 또렷이 놓이기보다, 빼꼼 고개를 내미는 듯 등장한다. 투명망토를 두른 듯, 불분명한 기억 속을 슬그머니 탐험하는 감각. 분명하지 않기에 상상은 자연스럽게 덧붙여지고,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와 어긋난 채 내 안에서 재구성된다.

사진과 기억 속의 나를 포함한 모든 대상과 장면들은 이미 그곳에 없다. 그 순간은 종료되었고, 시간은 지나갔다. 그러나 작가는 화면에 남은 재봉선을 통해, 지금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님을, 이는 분명히 발생했던 일임을 암시한다. 그렇게 그의 작업에서 껍데기는 완전히 벌려지지도 완전히 닫히지도 않은 채 기억과 상상의 경계를 유영한다.

 

“익명의 물도 나의 모든 비밀을 안다.”1) 깊은 대양으로의 다이빙

어떤 문장들은 명확한 결론에 도달하기보다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기를 요구한다. 정지원의 작업은 끝까지 말해지지 않기를 원하는 내밀한 문장들을 물속에 담가 두었다가, 이를 천 위에 쌓아 올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그의 작품 속 물이라는 재료와 주제는 단순히 작품 창작의 수단이 아니라, 의미를 느슨하게 풀어내고 감각을 확장하는 ‘대양(大洋)’이 된다.

작가는 소설 속 강렬한 문장에서 작업의 실마리를 얻는다. 그러나 화면 위에 옮겨진 문장들은 결코 발화되거나 해석되는 대상으로 머물지 않는다. 언어는 물속에서 형태를 잃고, 문장은 분명한 의미를 전달하기보다 일렁이는 리듬으로 변모한다. 정서현의 물이 기억처럼 잔잔히 번진다면, 정지원의 물은 관객을 집어삼켜 심연으로 이끄는 거대한 파도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설명보다는 빠져드는 경험, 명확한 읽기보다는 이름 모를 문장들이 유영하는 바다로의 다이빙에 가까운 감각이다. 천 위로 번지고 겹쳐지는 흔적들은 어떤 결론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다만 스며들고 흐를 뿐이다.

관객은 이 깊고 푸른 바다 안에서 텍스트라는 이성적인 알맹이를 찾는 대신, 스스로가 물에 잠기는 감각에 몸을 맡기게 된다. 말보다 먼저 반응하는 몸의 언어, 그리고 그 안에서 길어 올린 익명의 비밀들. 정지원의 작업은 그렇게 우리를 침묵과 잠김의 미학 속으로 끌어당긴다.

 

형태의 위계와 감각의 망설임

김신형의 그림에서 원통형 기둥들은 직립하거나 눕혀진 채 화면을 차지한다. 그리고 사람과 사물, 건축을 가장 단순한 구조로 압축한 듯한 이 매끈한 형식 속으로 신체의 조각인 ‘손가락’이 불쑥 침투한다. 이 신체의 조각은 그의 작업이 단순한 형식 실험에 머무르지 않음을 암시한다. 김신형은 “화가란 눈과 손을 쓰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시각과 더불어 살성과 접촉, 직접적인 감각에 대한 그의 관심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무엇이 먼저였는지, 손에서 기둥으로 향했는지 혹은 기둥에서 손으로 되돌아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원기둥의 표면과 겹쳐져 있는 손가락 형태는 무언가를 실제로 감각하려는 욕망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직 닿지 못한 채 머뭇거리는 몸짓으로 읽히기도 한다. 단순한 형태로 환원된 형상 사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지각의 방식은 하나의 의미로 수렴되기보다 관객의 시선에 따라 여러 방향으로 열린다.

이러한 읽기는 <눕고 눕히기>에서 마르지 않은 채 흘러내린 물감 자국을 통해 위와 아래, 중심과 주변이라는 위계를 무력화하는 것과도 맞닿아있다. 기둥은 세워지다 기울고, 결국 눕혀진다. 한때 세계를 제패했음을 암시하던 승전 탑은 더 이상 중심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곧게 선 기둥이 주던 경외감과, 그것이 더는 절대적 권위가 아닌 현재 사이에서 세워진 것과 눕혀진 것, 중심과 주변은 고정된 위계가 아니라 언제든 뒤바뀔 수 있는 상태로 전환된다.

불안정한 균형 위에 올려진 견고한 형태들. 관객은 그 앞에서 구조와 질서, 찬란한 영광에 대한 관습적 기대를 잠시 내려놓는다. 우리가 지금 기대고 있는—혹은 한때 기대었으나 머지않아 사라질지도 모를— 권위를 생각하며.

 

복제의 층위, 추상으로 침전하는 기호

김사피의 작업은 디지털 세상 속 미소녀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가볍게 소비되는 이미지를 캔버스 위에 다시 그리며 물성을 부여한다. 아스라이 지워진 듯 그려진 〈Betty〉와 두터운 물감으로 구획을 나눈 〈Risaie〉의 그리드 안에는 여전히 미소녀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붓질이 반복되고 물감이 두터워질수록, 디지털 이미지가 지녔던 즉각성과 가벼움은 점차 옅어진다. 캔버스 위 이미지는 더 이상 빠르게 소비되는 기호로 머물지 않는다. 디지털 이미지를 회화로 옮기고 다시 반복해 그리는 과정에서 또렷했던 얼굴은 점차 덩어리로 인식되고, 미소녀라는 구체적인 대상보다 추상적인 색면이 전면에 드러난다. 그러나 이 색면 아래로 비자연적인 형광빛 색채와 형태의 잔재가 스며 나오고, 이미지를 지워내려는 시도는 역설적으로 또 다른 형상을 불러낸다. 작가는 그 위에 다시 제목을 부여함으로써, 관객이 지워진 형상과 남겨진 색채 사이에서 새로운 감각을 경험하게 한다.

작가는 서브컬처라는 사회적 맥락과 순수미술(Fine Art)이라는 두 층위를 한 화면에 정교하게 겹쳐 놓는다. 두껍게 쌓인 물감은 이 두 층위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벽처럼 기능하며 이미지와 감각, 제도와 취향 사이의 간극을 드러낸다. 디지털 이미지는 얇은 표면처럼 보이지만, 회화의 물질성 또한 또 다른 껍질일 수 있다. 무엇이 알맹이인지 단정하기보다, 김사피의 회화는 우리가 익숙하게 소비해 온 이미지의 외피를 흔들며 그 아래에 남아 있는 형태와 감각의 잔여를 드러낸다.

 

결국, 이들이 꺼내 놓은 껍데기는 알맹이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인 동시에, 안쪽의 밀도를 짐작하게 하는 얇은 막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껍데기는 단단한 물체가 되어 존재를 떠받치고, 누군가의 껍데기는 얇은 커튼이나 일렁이는 물결이 되어 내부의 떨림을 전달한다. 작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길어 올린 이 시각적 껍데기들은 이제 전시장이라는 공간에서 관객의 삶과 맞닿는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애도와 닿고, 나의 희미한 기억이 누군가의 선명한 푼크툼으로 치환되는 순간. 그 찰나의 마주침을 통해 우리는 타인의 알맹이를 조심스럽게 짐작하며, 역설적으로 내 안에서만 크게 부풀어 오르는 그 까끌까끌한 진주를 다시 보듬을 것이다.

1)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김병욱 역 (이학사, 2020), 19.

박이정 (갤러리 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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