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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을 낳는 작은 곡예사
A Laugh-breeding Little Performer


김륜아
더 소소
2024. 6. 8 - 7. 5

 

전시를 위한 글 ​

 

김륜아

 

    회화란 어떻게 보면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자연물인 인간이 본능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 행위를 다른 자연물들과는 다른 것으로 구별하는 것은 인위적이고 웃긴 일이다. 앙리 베르그송은 그의 저서 『웃음-희극성의 의미에 관하여』에서 웃음의 핵심을 인위성으로 설명한다. 자연스러워야 할 것이 기계처럼 다뤄지거나, 생명이 기계로 위장할 때 그 대상은 우스워진다는 것이다[1] 이에 따르면 사회도 하나의 생명체인데 자연법칙이 아닌 인위적인 사회규정을 따른다는 점에서 희극적이다[2] 평소에는 너무 익숙해서 잊고 살더라도 그 대상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강조되면 순식간에 진지함은 웃음에 먹혀버리고 대상은 어색해진다.

     이런 관점에서 표현주의 회화의 붓질이 드러나는 물질적 표면은 우스운 것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인간의 몸에 존재하는 유연성(정신적인 활기를 뜻한다)과 물질성 중 물질성만이 강조되면 웃음을 유발한다[3] 이와 같은 맥락에서 베르그송은 정신이 중요한 상황에서 육체로 관심이 쏠리게 되는 상황을 희극적이라고 설명했는데, 이를 인간이 만든 것에도 적용하면 ‘내용을 지배하는 형식’은 -제멋대로 억지를 부리는 글에서 느껴지듯-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다[4] 회화의 본질은 평면성이라고 주장한 탓에 추상회화가 그 정신적 지위를 잃고 물건이 되게 한 그린버그의 사례나 형이상학적 이분법 아래 고귀한 정신을 표현했다는 추상표현주의에서 정신보다는 붓질의 물질성이나 화가의 행위가 더 눈에 들어온다는 점을 생각 해보라. 할 포스터는 표현주의의 물질적인 붓질은 반복 사용되면서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기호가 되며, 그 결과, 이런 흔적들은 화면으로부터 분리된다고 분석하기도 했다[5]

     표현주의 회화에서 붓질과 더불어 강조되는 색도 사실 우스운 것이다. 인간은 반사되는 빛의 파장 중 일부만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물체의 진짜 색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움베르토 에코에 따르면 색은 빛에 따라서 변할 뿐 아니라 문화권에 따라서도 그 이름과 성질이 달라진다[6] 같은 이름의 물감 튜브도 제조국과 제조사에 따라 그 색이 다르다. 그럼에도 화가들은 훈련받은 자신의 눈으로 변화하는 미묘한 색의 차이를 잡아낼 수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가을을 아름답게 수놓는 단풍도 적녹색맹에게는 지저분하게 보일 뿐이다. 인간의 기준에 따라 색각이상과 비색각이상을 나누는 것, 빛의 반사일 뿐인 색에 목을 메는 것. 이런 우스움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오만이다. 화가는 자신의 눈으로 보이는 한계 내에서 화면을 만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화가가 우스운 존재가 되기를 자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의 규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자연물이라는 인간의 존재부터가 희극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세계를 보고 인식한 것을 나타내려는 욕망은 라스코의 동굴에서부터 이어져 온 그림의 본질이다. 그런 우스운 인간의 오래된 욕망에서 표현의 주관성이 발현된다면, 그것은 아무리 대체하려고 해도 대체될 수 없는 것이다. 미하엘 엔데의 단편 소설 중에서는 인간이 만든 도시가 역으로 인간을 잡아먹는 무서운 이야기가 있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세계 속에서 잡아 먹히지 않고 자아를 유지하려고 발버둥친다. 깨달음은 자아를 초월하는 것에 있을 진데 그 순간을 평생 견디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러니까 우리는 착각 속에 살 수밖에 없다. 붓질이 질척거리면 거기에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미묘한 색을 구별하며 뭔가 다르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인간이 표현주의적 화면에 끊임없이 매혹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욕망이 도가 지나치면 화가는 불구가 된다. 이우환에 따르면 화가와 테마와 재료는 제작이라는 욕망 작동으로 움직이는 기계다. 이때 로봇의 일은 재생산이다. 데이터가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로봇은 예술가의 세상을 다시 붙잡고 싶은 욕망과 맞물린다. 본 것이든 머릿속 이미지든 화가는 재현을 시도한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재현, 즉 나르시시즘으로, 근대 자본주의에 걸맞은 작동방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르시시즘은 결국 자아의 바다 상태를 낳고, 고립되고 분열된 자아는 더 이상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구축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많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자의적 행동을 넘어서고자 했다. 그려야 할 걸 찾지 못한 사람, 있어도 그걸 무시하고 파괴하는 사람도 있다. 회화의 지위는 과거보다 높아졌지만 화가는 여전히 바보 같다는 말을 듣는다. 그럼에도 화가는 세계가 붓과 캔버스, 물감과 손 사이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림을 완성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회화라는 행동 자체가 지식과는 다른 차원에 속하기 때문에. 회화를 고상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자아로부터 멀어지고 세계와 마주치기 위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7]

     재생산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속하기 위해 자아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는 아이러니. 하지만 희극은 주인공이 진지하면 진지할수록 웃긴 법이다. 현실을 심각하게 다룰 수 없는 인간이야말로 삶을 통찰하게 만든다. 이 시대의 작가들은 대단한 꿈이 있다기보다는 창작을 할 수밖에 없어서 창작을 하는 존재들이다. 그 중에서도 화가들은 자신이 몸으로 경험한 진실이 전달되리라 믿는, 그러면서도 자아를 지워 그림을 지속하고 싶어하는, 순진하고 웃긴 사람들이다. 마크 트웨인은 타자기를 “호기심을 낳는 작은 익살꾼 (A Curiosity-Breeding Little Joker)”이라고 불렀다. 그는 처음에는 호기심에 타자기를 샀지만 날이 갈수록 타자기가 자신의 성격을 망친다며 타자기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그 사람도 같은 이유로 타자기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고, 타자기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증명됐다[8] 트럼프에서 조커는 판을 뒤집는 열쇠지만 도둑잡기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빨리 넘겨야 할 카드다. 카드 속 조커는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넘기며 웃고 있다. 그렇다면, 표현주의 화가를 “웃음을 낳는 작은 곡예사 (A laugh-Breeding Little Performer)”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해석과 내용은 다른 이들에게 넘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도록 약간의 여지만을 남기고. 중요한 것은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계속하는 것이다. 인간의 정수인 웃음을 만들어야 하는 화가란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1] 앙리 베르그송, 『웃음-희극성의 의미에 관하여』, 정연복 역, 1판 2쇄,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22, p.49

[2] 위와 같은 책, pp.51-53

[3] 위와 같은 책, p.56

[4] 위와 같은 책, pp.56-59

[5] Baum, et al. Rothko to Richter : Mark-Making in Abstract Painting from the Collection of Preston H. Haskell / Kelly Baum with Contributions from Hal Foster, Susan Stewart, and Eleanor Stoltzfus., 2014. pp. 29-30

[6] Umberto Eco, 「How Culture Conditions the Colours We See」, 『COLOUR』, David Batchelor 편, London: Whitechapel Gallery and The MIT Press, 2008, pp.178-185

[7] 이 문단은 다음을 요약한 것임. 이우환, “로봇과 화가”, 『여백의 미학』, 김춘미 역, 1판 14쇄, 서울: 현대문학, 2002, pp.137-141

[8] Mark Twain, “The First Writing Machines”, AmericanLiterature.com, 2022. https://americanliterature.com/author/mark-twain/short-story/the-first-writing-mach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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