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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사람, 사람, 가까운 사람
 
강석호, 노충현, 서동욱
2021. 8. 7 - 9. 19

                                                                                           그와의 거리

 

                                                                                                                                                                          전희정(갤러리 소소)

 

여기 세 사람이 있다. 먼 사람, 사람, 가까운 사람. 강석호, 노충현, 서동욱 작가는 저마다의 거리에서 대상을 바라본다. 그들은 무엇을 의도하여 그 거리를 선택했는가? 어떻게 표현했는가? 그리고 작품을 보는 사람은 어떠한 감흥을 받는가?

가장 가깝고도 먼 사람

강석호 작가는 사람을 크게 확대하여 부분만을 그린다. 표현방식에 있어서도 대상에 대한 세밀한 묘사보다는 화면 안에서의 조형적 형태를 우선시한다. 그렇기에 작품 속 대상은 인물로서의 정체성에서 멀어지며 화면 안의 균형과 조화를 위한 조형요소가 된다.

조형에 치중한 이러한 작업방식은 역설적이게도 대상에 대한 심리적 반응을 강하게 만든다. 누군가의 배가 화면 전면에 드러난 작품을 보자. 튀어나온 배꼽, 동그란 배꼽, 길쭉한 배꼽, 어두운 배꼽 등등. 가운데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색채와 화면 전체의 구도를 보던 사람들은 이것이 곧 쉽게 볼 수 없는 타인의 신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친다. 너무나 확대되어 가장 멀어진 대상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새삼 그 정체를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만든다.

내 앞에 선 그 사람

서동욱 작가가 선택한 거리는 우리가 가장 가깝게 느끼는 내 앞에 있는 그 사람과의 거리이다. 잠들어 있는 인물, 앉아서 기타를 치는 인물, 가만히 서서 정면을 바라보는 인물들은 우리의 평소 시야 속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서동욱 작가의 거리는 가장 익숙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거리에도 불구하고 대상은 회화 너머에 있다. 인물들은 회색 톤으로 절제된 색채 뒤로 물러남으로써 가장 익숙한 거리를 낯설게 한다.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은 뒤통수, 정면을 응시하는 회색 눈빛은 아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지만 정확히 그 사람은 아니다. 그렇기에 작품 속 인물에서 느껴지는 것은 누군가에 대한 기억, 혹은 향수와 같다. 가장 익숙한 거리에 있지만 회화의 표면 뒤에 있는 인물은 현실과 예술 간에 존재하는 미묘한 긴장을 생각하게 한다.

멀리 보이는 그 사람

노충현 작가의 작품에서 사람은 가장 멀리 있다. 작품 속 인물들은 풍경 속에서 실루엣만으로 표현되어 있다. 조화로운 구도와 색채로 이루어진 작품을 보는 감상자의 시선은 먼저 전체 풍경을 향하게 되고 이후 자연스럽게 인물로 옮겨간다.

여기서 사람에 대한 감흥은 주변 환경에 의해 일어난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겨울 풍경 속 바퀴자국이 난 길 위의 인물에서 알 수 없는 쓸쓸함이 보인다. 화창하게 비치는 햇살과 푸르른 생기를 담은 풍경 속 인물에서는 노동의 생기와 고단함이 같이 전해진다. 이러한 감정의 발생은 사람에 대한 작가의 해석 때문일 수도 있고 작품을 보는 나의 마음이 투사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렇게 노충현 작가의 작품은 가슴 속에 일어나는 감정의 형태를 담백하게 볼 수 있게 한다.

회화는 현실과 가깝고 또 멀다. 사람들은 서로 멀고도 가깝다. 《먼 사람, 사람, 가까운 사람》 속 그와의 거리는 항상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며 요동친다. 작가는 얼마나 멀리, 혹은 가까이에서 그 사람을 보고 있는가? 그것을 보는 내 마음 속 그와의 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이러한 질문 끝에 도달한 저마다의 ‘거리’에서 《먼 사람, 사람, 가까운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림의 뒷면

                                                                                                                                                                                              노충현

석호 동욱이 나, 모두 사진을 이용한다. 직접적으로 대상을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통해서 보는 것이다. 작년에 석호는 정물을 ‘보고’ 그린다고 했지만, 다시 사진으로 돌아왔다. 세 사람의 그림을 사진적이라 할 수 있지만 사진이 될 수는 없다. 그 차이는 사진 속에서 각자가 보려고 하는 것을 상상해서 덧붙여 그려 놓았기 때문이다. 그 상상 안에 ‘거리’가 포함되어 있다. <먼 사람 사람 가까운 사람>에 관한 글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가 그림 주변의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 싶었다.

석호는 늘 사람들 속에 있었다. 그 주위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고 사람들로 인해 늘 분주했다. 그는 동시에 여러 가지 일들을 만들어나갔고 그로 인한 어려움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배시시 멋쩍게 웃으며 그들과 대화를 나누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데 석호는 눈을 마주치면서 대화하는 일이 드물기때문에 아마도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약간 난감해할 수 도 있었을 것이다. 말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향할 뿐 그의 눈은 그의 그림처럼 얼굴 아닌 다른 곳에 가 있었을 거라 짐작해본다. 석호가 온전하게 대상을 그린 것은 내 기억에는 다정하게 보살폈던 강아지 알투와 디투 그리고 해골, 육면체 퍼즐큐브가 전부인 것 같다. 그의 그림들을 입체적으로 설치해본다면 무엇보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 그가 있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석호가 이용하는 사진은 매우 작다. 대략 가로세로 5~6cm미만인데 이것을 확대해서 그림을 그린다. 화가들은 원하는 방향에 따라 사진의 크기나 디테일을 참고하는 편인데, 그의 경우에는 작은 사진만 필요했던 것이다. 언젠가 그는 ‘지친’ 상태에서 그림 그리기가 편하다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대개의 화가들이 그림에 온 신경을 쓰는 반면에 석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다방면에 걸쳐 박식했고 그림보다는 다른 곳을 향해 관심의 방향을 틀었다. 딴 짓을 해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량은 놀라울 만큼 많다. 첫 개인전부터 이미 그의 화법畵法은 완성된 상태였다.

그림의 성격과 관련하여 오디오이야기를 덧붙이고 싶다. 화가들의 작업실에 하이엔드급 오디오가 있는 것을 종종 본다. 석호의 경우에는 마치 소리성性에 빠진 엔지니어처럼 자신이 듣고 싶은 소리를 찾아, 쉽게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기꺼이 어려움을 감수하는 쪽이었다. 그래서 기기의 교체가 잦았다. 물론 음악을 듣는 것도 즐겨했지만, 멜로디보다는 소리의 성질에 더 민감했던 것 같다. 이것은 매체성에 대한 탐구와 직결된다. 석호의 그림이 회화성-매체성과 관련하여 논의되는 부분과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이라 생각한다. 많은 시도를 한 후에 석호가 다다른 지점은 오래된 아날로그 방식이었다. 그 소리를 한껏 즐기기도 전에 작업실 한구석에 거대한 기기의 탑을 세워놓고 거기서, 멈추어버렸다.

동욱이는 석호와 달리 불특정한 대상을 삼지 않고 신중하게 인물을 선택한다. 동일한 인물을 그린 그림들도 여러 점 있는데, 선택의 기준을 알 수 없지만 그가 말하는 분위기나 멜랑콜리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사람을 택한다고 본다. 이와 관련해 기억나는 것이 있다. 가까운 사람을 그리면 ‘그림’이 되고 주문받아 모르는 사람을 그리면 ‘사진’처럼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은 그의 회화에서 모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준다. 소묘를 중시했던 에드가 드가는 인물화보다 풍경화를 하급에 두었다. 풍경화에는 대상에 대한 자의성이 더 많이 개입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동욱이보다 한 단계 아래에 있는 셈이 된다. 동욱이처럼 아카데믹한 방식으로 동시대의 인물을 그리는 화가는 내 주변에는 없다. 그가 그린 인물들은 대체로 젊고 세련된 인상을 준다. 아직 사회에 발을 들이지 않은 이들의 두려움이나 실연으로 인한 상실감 혹은 알 수 없는 나른함에 젖어있는 듯한 심리적 상태가 그의 관심사로 보였다. 그의 그림에 대해서 영화적이라는 수식어 붙는 데, 그림을 보면서 어떤 스토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을 어쩔 수 없다. 그의 개인전 <그림의 맛>전시에서 유난히 푸른 빛이 감도는 그림<SH>를 좋아했는데, 좁은 주방사이로 욕실의 변기가 엿보이고, 머뭇거리며 서있는 젊은 여자 앞으로 문이 열리고 마루바닥에 빛이 드리워진 그림이다. 이 그림뿐만 아니라 다른 그림에서도 그가 ‘바닥’에 얼마나 공을 들여 묘사하는지 찾아 살펴보기 바란다. 세심한 미장센은 그가 회화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영상을 찍은 경험으로부터 익힌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물을 그리기 전에 인물을 위한 셋팅setting에 신경을 쓰고 빛의 강도나 방향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언젠가 그는 애도와 멜랑콜리를 비교하면서 그의 인물들이 멜랑콜리에 더 가깝다고 한 적이 있다. 그의 탁월한 묘사는 이러한 정서를 극적으로 고조시키는 데 일조한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사실주의를 지루하다고 평했다. 또한 회화가 서사를 다루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동욱이 그림은 모두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동욱이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는 늘 자신만만하다. 나는 그게 부럽고 좋다.

내가 나에 대해서 쓰는 것은 어색하다. 나에 대한 이야기들은 다른 곳에서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화가의 그림에는 어떤 징후나 예감 같은 것들이 스며들어 있다고 믿게 되었다. 최근에 지인들과 석호의 작업실을 찾았다. 순간 나는 너무 늦게 왔다고 생각했다.

                                                                                가까이 가기 위해서 멀리

                                                                                                                                                                                              서동욱

우리 중에 가장 먼 사람은 노충현이다. 그는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이 속해 있는 풍경을 조망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은 강석호다. 그는 하나의 대상의 부분을 확대해서 그 속에 세계를 만든다. 나는 그들의 중간이다. 대상을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면서 그것의 존재감을 받아들인다. 이것은 대상과 화가 사이의 시각적 거리에 관한 비교이다.

하지만 심리적인 측면에서 대상과 가장 먼 사람은 오히려 강석호다. 사람들은 그가 대상과 아주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멀리서 본 것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고 확대해서 기록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대상을 측정하는데 필요한 현실의 맥락이 부재한다. 그는 대상의 용도나 사회적 역할, 혹은 ‘우리의 삶 속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가치판단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나는 그리려는 대상에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고, 그것을 그저 패턴으로 본다.”고 말한 적이 있다. 숙련된 화가들의 시선은 사물의 용도나 형태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화가의 도구들과 만나서 캔버스에 기록될 수 있는지를 습관적으로 관찰한다. 그가 보는 것이 6가지 색의 큐브이건, 옷감에 염색된 식물의 무늬이건, 배꼽 주변의 피부이건 간에 그는 대상이 아니라 그것이 기록될 자신의 유화를 상상한다. 얼마 전에 강석호가 말하길 작업실에 방문한 누군가가 배꼽을 그린 그림을 보고 “귀를 아주 잘 그리셨네요.”라고 했다며 즐거워했다. 그렇지. 그는 대상 자체보다는 그것에 관한 회화적 시선에 질문을 던진다. 나는 강석호가 묻고 또 물었던 그 질문이 “그리기란 무엇인가?”였다고 생각한다. 그가 그리려던 것은 ‘배꼽’이 아니라 ‘그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추상형식이 회화의 자의식을 돌아보는 유일한 방법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래서 강석호는 모더니스트에 가깝다.

가장 가까운 사람은 나다. 심지어 초창기 인물화들은 대상에 투사했던 나의 모습, 일종의 자화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는 언제나 대상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예를 들면 플래쉬 섬광의 차가움은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에서 동일시를 거두게 만들었고, 최근에는 그림 속의 장면들이 영화처럼 연출된 허구임을 강조해서 현실로부터 거리를 만든다. 이러한 장치들은 나의 초상화들을 대책 없는 연민에서 구해낸다.

나의 그리기는 삶에서 느끼는 것에 형태를 부여하는 일이다. 지난번 개인전 제목을 《그림의 맛》으로 했다. 그 맛은 쌉쌀하고 허세로 버무려져서 달짝지근한 도라지 위스키의 맛이다. 현실은 별로 그렇지 않지만, 나의 그림은 좀 우아했으면.... 예술에서 나는 로맨티시스트에 가깝다.

노충현의 심리적 거리는 강석호보다 조금 가깝고 나보다 멀다. 그의 그림은 꽤 건조하다. 광택 없이 드라이한 표면뿐만 아니라, 그는 최대한 감정을 절제해서 시각적인 거리만큼이나 멀게 심리적인 거리를 만든다. 하지만 강석호의 거리가 무관심이라면 노충현의 거리는 감정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정제해서, 추출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그림에서 저녁 무렵에 막걸리 한 병을 비닐 봉투에 담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쓸쓸한 한 중년 남자의 시선을 본다. 여름 저녁의 눅눅하고 탁한 공기, 홍제천의 비릿한 물 냄새, 내부순환로의 낡은 교각, 그리고 그 아래에서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들, 그 남자는 이런 것들로부터 다정함을 느꼈을 것이다. 노충현은 늘 미술과 삶이 교차하는 가능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리얼리스트에 가깝다.

우리는 공통적으로 여전히 대상의 ‘닮음’에 집중한다. 꽤 빈번하게 “대상과 닮게, 사실적으로 잘 그리는 게 뭐가 중요한 거냐?”라는 공격적인 질문을 받곤 한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림에서 어떤 볼만한 것이 있던, 그려진 방식이 어떻든, 그것들은 항상 비가시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려는 것은 ‘그림’이 아니라 ‘그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에 관한 담론들은 대부분 의미론적이다. 그래서 회화 자체가 아니라 회화의 지시대상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이 오독이 현대미술과 회화 사이의 거리이다. 회화의 사실주의는 어떠한 경우에도 일종의 해석이다. 회화에서 사실적인 방식이 대상을 객관적으로 표현한다는 생각은 오해다. 다만 화가의 예술적 기획을 실감나게 보여줄 뿐이다.

나이가 들어서 원시가 온 사람들은 휴대폰을 멀리 본다. 적당한 거리가 조성되지 않으면 눈이 글씨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림 앞에서 우리는 서서히 뒤로 물러선다. 그러다 보면 그림을 가장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최적의 지점을 찾게 된다. 이것이 거리이다. 적당한 거리는 비판 정신의 기본 조건이고, 인식주체와 대상을 분리해서 객관성을 확보한다. 그래서 거리를 만들 수 없는 나 자신이나, 혹은 아주 가까운 사람에 대해서 말하기가 더 어렵다. 강석호와 노충현과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무척 가깝게 지냈다.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노충현은 연희동에 살고, 나는 평창동에 살고, 강석호는 명륜동에 살았다. 강석호는 구기동으로 이사하려고 했었다. 그랬으면 우리집과 더 가까워졌을텐데....

                                                                            조금 떨어져서 본 가까운 사람들

                                                                                                                                                          이은주(독립기획자, 미술사가)

전시가 열리기도 전에 강석호가 멀리 떠나버렸다. 전시는 예정대로 하게 되었지만 그의 작품은 예기치도 않게 유작이 되었다. 이 시점에서 전시와 관련된 누군가가 그에 대한 추모의 글을 써야 한다면, 그와 가까웠지만 한 발짝 떨어져서 볼 수 있는 내가 쓰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먼 사람, 사람, 가까운 사람》이 열리게 된 과정을 더듬으며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이 전시의 주제와 관련하여 생각해본다면, 강석호는 대상을 가장 가깝게 끌어당겨서 가장 멀리 만드는 사람이다. 노충현은 대상을 먼 거리에 둠으로써 그것이 놓인 맥락을 정확하게 보려는 사람이다. 서동욱은 있는 그대로의 대상에 환영을 입혀 극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세 작가가 이렇게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대상과 이미지와 그림 사이에서 산다. 공유하는 것이 같으면서도 태도가 다른 차이로 인해, 이들의 작품은 함께 볼 때 각자가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더 잘 드러난다. 애초에 이 세 작가를 함께 묶어보고자 했던 것은 이런 이유였다. 더욱이 이들이 같은 세대의 회화 작가로서 2000년대 이후 한국 현대회화의 한 부분에서 빠질 수 없는 작가들이라는 점은 미술사 연구자로서의 내 관심사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세 작가와 나는 각기 다른 계기로 알게 되어 친해졌다. 강석호와는 2006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Propose 6》의 평론가 매칭을 통해서 그의 작업에 대한 글을 쓰며 가까워졌다. 그가 2010년 회화에 대한 책을 읽는 모임을 같이 하자고 제안하면서 2주마다 가진 모임을 통해 더 많은 공감대를 갖게 되었고, 공통의 이해를 기반으로 회화에 대한 전시기획을 같이 하기도 했다. 노충현과는 필자가 운영했던 비영리 전시공간 브레인팩토리에서 개인전을 가졌던 홍익대 출신의 작가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가, 강석호가 주도한 읽기 모임 멤버로서 더욱 가까워졌다. 노충현과의 공감대는 이후 그룹전 기획과 작가론 집필로 이어지면서 작업에 대한 이해로 발전되었다. 서동욱의 경우, 2008년 그가 기획했던 회화에 대한 세미나 《Dazed and Painted》의 패널이자 필자로 참여하면서 처음 같이 일한 후 꾸준히 그의 작업들을 찾아 보아왔고, 2018년 원앤제이갤러리의 개인전 서문을 쓰면서 한층 가까워지게 되었다.

내가 작가들과 맺는 관계가 대부분 그렇듯이, 이 세 작가와의 관계 역시 일에서 시작되어 작업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그 관계에는 일종의 동반자적인 동료애가 덧붙여졌다. 예술작업을 한다는 것은 단지 예술가라는 직업을 가지는 문제가 아니라, 살아가는 태도 자체와 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자로서의 나의 시선은 최종적 작품에 대한 객관적 해석자나 분석가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이들이 작가로서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지지와 애정이 동반된 것이었다. 2018년 7월 평창동의 수애뇨339에서 필자의 기획으로 열린 《Dialogue》전에서 이 세 작가를 함께 엮으면서 만들고 싶었던 것은 이런 동반자적인 관계에 기초한 대화의 장면이었다. 그것은 완성된 결과로서의 작품 이전에 존재하는, 좀처럼 붙잡히지 않는 비가시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공유하는 세계와 각기 다른 모색의 태도를 작품과 연결시켜 바라볼 수 있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종종 작업실 풍경에서 작업의 성격에 대한 단서를 발견하곤 한다. 강석호의 청파동 작업실은 바우하우스 식의 세련됨과 산장 주인집 같은 소박한 정감이 함께 있는 곳이었다. 강석호는 맛을 중요시하는 그의 취향대로 좋은 설탕과 커피로 입맛에 딱 맞는 카페라테를 뚝딱 만들어주곤 했다. 그 카페라테처럼 그의 작품 역시 언제나 세련된 조형미와 기교를 덜어낸 덤덤함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작업실에서 가까운 풍경을 작품의 소재로 채택하곤 하는 노충현에게 있어서는 작업실 내부의 요소보다도 그 위치가 중요했다. 《Dialogue》전을 준비할 당시 성산동에 있었던 노충현의 작업실은 여러 가지 취미활동의 잔재가 가득한 강석호의 작업실과는 달리 작업에만 집중된 공간이었다. 가까운 홍제천을 산책하며 시작한 새 연작들을 위한 다양한 구도의 홍제천 풍경 사진 프린트들과 진행 중인 회화 작업들이 벽에 가득 붙어있었고, 방문할 때마다 그가 집중하고 있던 작업의 시간에 대한 밀도를 느낄 수 있었다. 작품들 외에 별다른 장식이 없는 간결한 작업실에서 그가 내주곤 했던 간단한 제철 과일들은 건조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보는 이를 소외시키지 않는 그의 작업의 정취와도 닮아 있었다.

당시 평창동으로 막 이사했던 서동욱의 작업실에는 전문가 수준의 오디오 장비와 클래식과 재즈 명반들, 오래된 문고판 서적들이 작품과 함께 어우러져 교양있는 근대 지식인의 방과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의 작업실은 회화의 기술로서 적절하게 제어된 낭만성을 느끼게 하는 그의 작업과 매우 잘 어울리는 무대처럼 느껴졌다. 이런 맥락을 담아서 《Dialogue》전에는 세 작가들이 작업을 하면서 읽었던 책의 구절이나 직접 쓴 문장, 작업실 의자가 작품들과 함께 전시되었다.

제각기 다른 작업실 풍경만큼이나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세 작가들과 함께 했던 당시의 전시 준비의 과정은 꽤 즐거웠다. 연희동과 평창동 주변 맛집을 함께 방문하고, 서동욱의 작업실에서 음악을 듣고, 수애뇨339 전시장의 잔디 마당에서 담소를 나눴던 일상의 경험들이 진지한 작품 이야기들과 함께 녹아들었던 시간들이었다. 이 전시를 통해 한층 더 가까워진 우리는 2년에 한 번씩 이 전시를 계속 열어갔으면 좋겠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갤러리 소소에서의 이번 전시는 2018년 《Dialogue》전의 연장선에서 열린 전시이다. 갤러리 소소에서 이 전시의 후속편을 열고자 제안했던 것은 《Dialogue》전을 통해서 전하고 싶었던 대화의 장면이 전시를 보는 이에게도 공명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 전시는 각자의 사정들로 쉽게 진행되지 못했었고, 세 작가가 여러 다른 전시에 같이 초대되는 가운데에도 필자는 이런저런 일로 적극 나서지 못한 채 한 발 뒤로 빠져 있었었다. 3년만인 2021년 8월에 열리게 된 이 전시에서 세 작가는 각자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점의 차이를 거리의 문제로 풀어보자고 결정했고, 《먼 사람, 사람, 가까운 사람》이라고 전시 제목을 정했다. 근경과 원경처럼 대상을 바라보는 물리적 거리를 상정하면서도 대상을 그리는 일에 수반되는 각자의 태도를 함의하는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본격적인 전시 준비가 시작되면서, 필자 역시 밀린 일들을 정리하는대로 준비 모임에 합류하기로 했다. 강석호와 문자로 나눴던 마지막 대화는 이 전시 모임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가버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마도 홍은동으로 이전한 서동욱의 작업실에 모여서 이전처럼 음악을 들으며 소소한 사는 이야기와 함께 전시를 준비해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강석호의 작업실에 걸려있던 완성되지 못한 유작들을 떠올리면서, 그가 없는 전시를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 여전히 이상한 꿈을 꾸는 듯 그가 부재한 이 상황이 낯설기만 하다. 이 상황에 적응되는 순간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강석호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먼 사람, 사람, 가까운 사람》전이 열려야하는 것은 《Dialogue》전에서 우리가 공유했던 것들은 쉽게 사라질 수 없는 것들이며, 예술작업은 어쩌면 그 사라질 수 없는 것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석호의 작업실의 시간은 멈춰있지만, 작업실에서 그와 너무 닮은 작품들을 보면서 그를 만나는 듯 정말 반가웠다. 부재는 떠난 이의 존재성을 가장 확고하게 증명한다. 그 부재를 통해 사라지지 못할 것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열어보지 못하는 부재의 안쪽 통로에 어쩌면 또 다른 세계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강석호는 이전에 《Dialogue》전을 준비하면서 눈을 감아도 볼 수 있는 것을 그리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었고, 눈을 감은 그 자신의 확대된 얼굴과 감은 눈으로 본 달을 그린 그림을 전시했었다. 그는 이 때부터 모더니스트적 균형 감각을 가진 채로 보이는 표면 안에 있는 세계를 생각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최근 강석호는 상업화랑과 윌링앤딜링에서 전시된 바 있었던 루빅스 큐브 연작을 진행 중이었다. 큐브가 만들어내는 셀 수 없이 많은 경우의 수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그리기의 기법과 대상과 공간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함수를 그는 탐구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 연작에 대해 그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얘기했었다. 그는 아마도 조형적 미션을 하나씩 수행하듯 작업해나가면서, 현실과 대상과 그림의 세계 사이의 수수께끼를 풀고 싶었을 것이다. 인물을 주제로 꾸려진 《먼 사람, 사람, 가까운 사람》 전시에서도 이 큐브 연작 중 일부가 전시된다.

강석호의 청파동 작업실에는 이번 전시를 위해 진행했던, 사람의 배꼽 부위를 확대하여 그린 미완성 그림들이 아직 걸려있다. 가까이 당김으로써 오히려 무심해지는 그의 그림들에서 배꼽의 주인공이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강석호가 인간의 몸 중에서도 배꼽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이 인간을 탄생시키는 배꼽 안의 미지의 공간에 대해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마치 달을 생각하듯이 말이다. 그가 직접 말해주지 않는 한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아마도 강석호가 여기에 있다면, 전시 뒷풀이를 빙자하여 노충현, 서동욱과 함께 그가 좋아하는 계곡 어딘가로 더위를 피해 소풍 삼아 놀러갔을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음악을 들으며 시시한 잡담들에 섞여서 별일 아니듯 그가 완성하려던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이 전시에 함께 하고는 있지만 더 이상 우리가 볼 수도 갈 수도 없는 곳으로 떠난 그는 이제 그가 알고자 했던 것에 대한 해답을 얻었을까? 무척 궁금하고 보고싶다.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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